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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zed under 심리학 카페/깨달음의 심리학 & written by 창틀
가정 폭력- 관심을 공유하기
어제 전 가정 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기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었어요. 기관에서 제공하는 무료 상담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한 기금마련 행사가 진행 중이었죠. 참 훌륭한 일을 하는 곳이긴 했는데, 솔직히 말해 전 좀 불편했어요. 그 기관에 대해서, 혹은 그 기관이 하는 일 때문이 아니라, 제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팸플릿을 하나 봤기 때문이었어요.
이 팸플릿은 가정 폭력을
끝내자는 “모든 여성ALL
WOMEN" 캠페인을
광고하고 있었어요.
오늘날 가정폭력을 끝내자는 건 참으로 훌륭한
목표에요. 거기에 대해선 논쟁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 누가 가정폭력을
끝장내고 싶지 않겠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
“모든 여성” 또는 “오직 여성만이”라고 말하는 것들, 또는, 이 문제에 있어 “오직 남성만이” 또는 “넌 남성 성기 혹은 여성 성기를 가졌으니 낄 수 없어”, 또는 “네가 ‘남성 혹은 여성’의 집단에 일원이니 무언가 잘못이 있어” 식의 것들은 항상 절 좀 짜증나게 만들어요......
아, 농담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정말로 절 짜증나게 만들어요. 왜냐면 당신이 그런 식으로 한 쪽을 제외시키면,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특정한 인구통계학적 카테고리에 손가락질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사고는 일종의 맹점,
편견, 편협성을 표현하게 돼요. 만약 제가 유대인들을 지목해서 그들이 이러저러하다라고
말한다면, 전 편협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거예요.
하지만 젠더(gender) 문제는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질 않아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보통 한 쪽 성(性)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하죠. “오, 그들은 이래” 또는 “그들은 저래”
그렇다면 이러한 성적 편견이 이 “모든 여성ALL WOMEN" 캠페인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음,
제가 그 팸플릿을 읽었을
때, 전 스스로에 질문을 던져 보았어요. 가정 폭력을 멈추자는 캠페인에서 남자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들은 아예 치지도 않는 걸까?
그들은 고려되지 않는
걸까? 답은 간단해요. 남성은 가정폭력의
가해자다, 그렇지 않나요? 폭력적으로 행동하고, 칼을 들고, 총을 쏘고 집을 날려버리는 것은 남성이다. 남성은 가해자고 여성과 아이들은 피해자다. 팸플릿에 공공연히 써져
있진 않았지만, 분명히 이건 흔한 인식이에요.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세요, 그들은 말할 거예요, 남성이 문제고, 여성과 아이들은 피해자라고요.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요?
반드시 “모든 여성All women”이 “모든 남성all men”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에
맞서야 하는 걸까요”?
개인적으로,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전 제 자신의 삶을 가지고 직접 예를 들 수 있어요. 왜냐면 제가
어렸을 때, 저 역시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여러분이 예상하는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제가 심각한 정서적 심리적 학대, 게다가 (심각하진 않지만) 물리적
학대까지 겪긴 했지만, 그건 남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 의한 것이었어요. 정말 있는 그대로 얘기하건대, 제가 태어난 이후로, 절 학대한 것은 여성이었어요. 덕분에 전 아직도 그 문제로 씨름하고
있죠.
잘 들어보세요.
제가 두 살이었을 때, 제 아버지는
어머니와 두 명의 어린 아이들을 남기고 떠났어요. 이후 10여년을
제 어머니는 제 동생과 저에게 정서적, 심리적, 그리고 물리적
학대를 가했어요. 물론 전 어머니가 절 사랑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 여성은 저와 제 동생을 혁대, 스푼, 기타 가구를 가지고
그게 부서질 정도로 때렸고 우리는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멍이 들기도 했어요. 제 어머니가 저희에게
가한 물리적 학대는 “아빠”가 가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심했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상처를 입힌 것은
정서적/심리적 학대였어요.
그녀는 종종 저와 제 동생을 너무도
긴 시간 동안 궁지에 몰아넣었어요. 상당한 기간 동안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격리시켰고, 우리가 보잘것없고,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끼게 만들었죠. 제 어머닌 그야말로 정서적, 심리적 학대의 교과서적 사례였어요. 그녀는 심지어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으면서 우리를 내팽개쳐둔 채 다리로 달려가 뛰어내리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여러분은 자신의 엄마가 너희들을 혼자 둔 채 떠나겠다고 협박하는 말을 들으면서 원래 부모로부터 받았어야 할
사랑, 주의, 그리고 돌봄을 갈구하는 그런 여덟 살 아이에게
느껴졌을 정서적, 심리적 두려움을 상상하실 수 있나요?
전
우리 형제가 경험했던 장기간의 체계적인 학대로 인한 정서적, 심리적 영향에 대해선 세세히 다루지 않으려
해요. 그렇지만, 이러한 학대가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아는 덴 무슨 엄청난 상상력이나 대학원 학위가 필요할 거라 생각진 않아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남성의 폭력으로
인한 여성 희생자라는 그 모든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저를 학대한 건 제 엄마만이 아니었어요. 제 첫 번째 여자친구가 기억나네요. 보니Bonnie라는 이름을 지닌 여성이었죠. 이따금 제 주변을 신나게 춤추고
돌아다니면서 제 얼굴을 반복적으로 때리곤 했죠. 그러면서도 웃으면서 제게 “넌 내가 왜 이러는 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곤 했어요.
대체 거의 1년
가까이 데이트를 해 온 상대에게 이처럼 냉혹하고 비열한 모욕을 할 수 있는지 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거기에 서서 충격에 빠져 있는 것뿐이었어요. 남성은 원래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건대, 전 그에 맞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어요.
전 그저 거기 서서 맞기만 했어요. 돌아보면, 전
그게 이 세상에서 당신을 상처 입히고 학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기본적인 진실을 확인하게 해 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이건 겨우 두 가지 사례에 불과해요. 제가 1학년 때 만난 수녀, 여자 영어 선생님, 또는 제가 아이였을 때 절 돌본 사촌도 있어요. 절 돌본 사촌은
침대 밑의 괴물 이야기를 가지고 어린 아이를 겁주는 것을 재미있다고 생각했었죠. 그 밖에도 제 삶에서
폭력적이고 학대적인 여성들은 많았어요.
제가 말하려 하는 요지를 파악하셨나요?
만약 제가 제 경험에 근거해 설문조사에 응한다면, 제가 가장 폭력적이고 비열하다고 느낀 성은 바로 여성이 될 거예요. 제
경험 속에서 남성은 심지어 척도 상에 점수로 매겨지지도 않을 정도에요.
그리고 전 여성의 폭력을 경험한 것이 저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부부는 우리가 살고 있는 St/ Albert의
지역 공동체 내에서 40 여 년 동안 가정 폭력 상담사들을 찾아다녔어요.
이건 흥미로운 이야기에요. 그들은 어느 날엔가 어떤 상담자의 사무실에 나타나선, 부인이 그녀가 얼마나 남편의 폭력에 희생되었는지를 과장되게 떠벌려요. 그러면
상담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뭐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각본에 따라 행동해요. 남편을 비난하고 그러한 기반 위에서 상담을 진행하죠. 그렇지만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일이에요. 40 년 동안의 오리무중 상담이라니! 제가
그들을 몇 회기 만나고 보니 사실 그 여성 역시 학대자라는 점이 분명해졌어요. 40년 동안이나 그녀는
휘두르고 소리치고, 할퀴고, 꼬집으면서 그녀의 아이들에게
한 바탕 정서적, 심리적 학대를 가했으며, 놀라운 것은, 이 작고 지루한 동네에서 이 부부가 만난 그 어떤 심리학자도 그녀가 학대자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것은 St. Albert의 상담 기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커다란 실패나 마찬가지에요.
왜냐하면 그들이 이러한 실상을
알아보지 못한 결과, 그녀의 아이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20여년 동안이나 심각한 정서적 학대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로 인한
심리적 영향도 보나마나 뻔할 테니까 말이에요. 그리고 이 문제가 특히 더 골치 아픈 것은, 이런 광경을 40년 동안이나 지켜 본 남편이 마침내 자신의 부인을
때리게 된 것임에도, 체포되고, 고소되고, 감옥으로 가는 건 '그' 라는 점이에요. 달리 말하자면, 그는 남성의 폭력에 대한 통계치, 그리고 '증거' 가 되는 것이죠. 그 결과 여성의 폭력이라는 현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감춰진
채, 그렇게 잊혀져요.
아마도 여러분은 이제 제가 왜 그토록 “모든 여성ALL WOMEN” 캠페인 때문에 짜증이 났는지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진짠가요?
정말 모든 여성이 가정 폭력을 멈추길 원하나요?
모든 여성이 희생자이던가요?
모든 여성이 남성에 대항해야 하나요?
질문이 단순하죠? 가정 폭력을 끝장내길
원하는 여성이 가정 폭력을 끝장내길 원하는 남성과 함께 서서 사회적 각본과, 성역할로부터 벗어나 이
가정폭력 문제를 다루는 건 어떨까요?
왜 여성이 단독으로 다뤄야 하나요?
오직 남성만이 학대한다는 착각을 영속시켜야 할 이유는 뭔가요?
뭐,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덴 여러
이유가 있어요. 첫째, 미디어가 이런 착각에 영합하고 있어요. 그들은 뉴스에서 여성들의 학대 피해 사례들을 집중조명하면서 우리에게 남성의 폭력이란 “현실”을 제시하는 경찰청
사람들 같은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거나 아니면 그냥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여성 폭력의 사례들을 무시하죠.
둘째,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유형의 폭력을 사용하도록 사회화되었어요. 하나는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죠. 남성은 주먹, 칼, 총을 사용하도록 독려 받죠. 소년들에겐 액션 피규어가 주어지고 '나쁜
놈(the bad boy)' 라 정의 내려진 모든 이들을 때려눕히고 날려버리라고 배우죠. 반면에, 소녀에겐 인형, 곰인형이
주어져요.
만약 소녀가 액션 피규어를 집으면, 빼앗기게 되죠. 그 결과, 소녀와 소년은 서로 다른 유형의 폭력을 익히게 돼요. 결과적으로, 남성이 자행하는 폭력은 더욱 가시적이에요. 만약 여러분이 아이를 때린다면 그 상처는 분명할 거예요.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아이에게 욕을 퍼붓고 아이를 위축시키거나 느낌을 상하게 만든다면, 그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여성의 폭력은, 비록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남성의 폭력보다 조금도
덜 해롭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에요. 제 딸아이의 학교의 교감이 최근에 제게 말했던 것처럼(그리고 모든 초등학교, 중학교 선생님들도 공감할 거예요), 소녀들은 학교에서 위계적인 등급매기기 행동들을 습득한 후, 소년들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악의적일 수 있어요. 소년들은, 그 교감이
말하길, 운동장에서 서로 싸우고 그걸로 끝나지만, 소녀들은
반면에, 미묘하고, 종종 공동으로, 매우 악의적인 공격을 가한다고 하더군요.
소년들은 주먹을 쓰고; 소녀들은 그들의
감정과 말을 쓰죠.,
그것은 서로 다른 유형의 폭력이에요.
하나의 사회로서의 우린 그저 여성이 행하는 폭력과 학대를 인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심각하고 해로운 문제에요. 진정
폭력적인 어린 시절을 경험한 한 작은 소년으로서 증언하건대, 전 제 삶 속에서 여성의 지속적인 정서적
테러에 당하느니 차라리 남자한테 맞는 편을 택했을 거예요. 적어도 때리는 건, 그 고통이 언젠간 사라지거든요. 적어도, 제가 남자한테 맞았다면, 어떤 사회복지사나 심리학자, 교사가 그걸 알아차렸을 것이고, 저와 제 동생은 우리가 필요한 도움을
받았을 거예요. 수 십 년 동안의 사회화를 거치면서 조용하고도 눈에 띄지 않는 학대를 감내해야 했던
우리 St. albert 의 한 가정의 아이들과는 달리 말이죠.
물론, 미디어의 무지나, 폭력의 성격과는 별도로 여성의 폭력의 보이지 않는 다른 이유들도 있어요. 세
번째 이유는 우리, 폭력을 경험하는 우리가 종종 더 심한 학대를 경험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걸
감춘다는 거예요. 한 명의 젊은 남성으로서 전 그 누구에게도 제 여자친구가 제게 한 짓을 말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만약 제가 했다간 비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에요. 전
제 친구들의 반응이 어땠을 지 알고 있어요. 그들은 제가 그녀에게 맞받아치라고 말했을 거고 절 비웃으면서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제가 여자한테 맞았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리고 신이시여, 전 경찰서까지 가서 그걸 알리려고 했었어요. 전 제 젊고 연약한 남성 자아가 그 모든 조롱을 견뎠을 거라 생각지 않아요.
그래서 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켰죠.
넷째, 우리는 여성들이 자행하는 폭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여성들이 하는 일을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때린다면, 그건 분명 폭력적이에요. 하지만 여러분이 어떤 이의 생김새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혹은
그가 나쁜 “인구통계학적” 집단의 소속이라고, 혹은 비실거린다고 그 사람을 여러분의 사회적 집단에서
배척한다면, 만약 여러분이 그들을 모욕하거나 기분 나쁘게 만든다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다면, 그것은 폭력이 아니에요. 운동장에서 싸우는 것이
폭력인 거죠. 심리적, 정서적 학대를 저지르는 소녀들은 좀처럼
폭력의 레이더 망에 포착되질 않아요.
마지막으로, 우린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맞서야 할 심각한 성적 편견을 갖고 있어요. 특히 남성의 정서와 그 민감성에 대해서 말이죠. 소년은 터프해야 한다고 그래요, 그렇죠? 소년은 감정을 지녀선 안 된다고 그래요. 소년은 느낌을 가져도 안
된다고 그래요. 소년은 울면 안 된다고 해요. 소년은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해요. 소년은 “뭉쳐서 그들의 힘을 보여주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고 하죠. 간단히 말해, 소년은 자신들을 정서적으로 거세하게 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찐따, 게이, 나약한 녀석이 되고 말죠.
그렇다면 만약 어떤 소년이 어떤 여성에
의해 맞는다면, 혹은 어떤 소년이 자신의 어머니한테 맞고 운다면, 그것은
그 소년의 문제인 거예요. 소년이 약하기 때문에 맞은 거라는 거죠. 만약
그가 터프해져서 남자처럼 행동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 하죠. 솔직히 말해, 그건 성차별적인 똥덩어리 같은 소리에요.
여러분이 자신의 아이를
그런 식으로 키우면 결국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과 공감하지 못하는 그런
정서적으로 거세된 남성들의 사회라는 결말을 맞게 될 거예요. 만약 그들의 어린 시절의 정서적 예민함이
그들에 의해 사회화되지 않았다면, 아이가 원래보다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은 더욱 커질 테고요. 여러분이 이 글의 핵심을 아직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제가
해 드릴게요.
여성들은 남성들이 자행하는 폭력에 남성들만큼이나 책임이 있어요. 여러분이 자신의 아이에게 폭력적인 액션 피규어를 건내고, 장난감
무기를 선물로 주고, 그들의 감정을 얕보고, 울지 말라고
말하고, 그들의 정서를 수용하지 못한 채 터프해지라고만 주문하고, 그들의
사랑스럽고 표현적인 본성을 차단하며, 그들을 향해 소리지르고, 고함치고, 때릴 때, 여러분은 다음 세대의 폭력적인 남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결국, 여성은 주된 양육자에요.
가정과 탁아소, 그리고 학교를 살펴보세요.
아이가 태어난 후 첫 십 년 혹은 그 이상 동안 아이들을 사회화시키고 돌보는
것은 바로 여성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그 모든 걸 유전자 탓으로 돌리지 않는 한(즉, 남성은 타고나길 폭력적이다),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적어도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폭력에 얼마간 책임을 져야 할 거예요.
이제 전 이 통계적으로 편향된 범죄적 체제에 대해, 그리고 정서적으로 거세된 남성이 어떻게 체제The System 의
필요조건들을 충족시키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이미 핵심은 밝힌 만큼, 더 이상은 얘기하지 않으려 해요. 제가 이 지점에서 하고 싶은 말은
만약 여러분이 가정 내의 폭력을 멈추는데 정말로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영속화시키는 일도 멈춰야 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사람들, 여자아이, 남자아이, 어린 아이, 그리고
여러분의 배우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세요. 여러분이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길 기대하는 지를 살펴보시고 여러분이 가정 폭력이란 문제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구는
일을 멈추세요.
우리 모두가 그 문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가 ‘성적 눈가리개gender blinders’를 벗어 던질 때까지, 우리가 스스로를
여러 집단으로 가르기를 멈출 때까지, 우리가 서로를 자신의 집단으로부터 배척하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젠더gender 게임을 멈출 때까지, 우리가 함께 서서 우리가 만들어낸 문제들을 직면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우린
우리 사회에서 폭력을 멈추겠다는 우리의 목표를 향해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외면한 채, 진실을
숨기고 신화와 착각을 영속화시키는 거나 다름없어요.
글쓴이 Michael Sharp
옮긴이 오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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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d #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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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표 총장에게 답한다
죽음의 사다리를 걷어치워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위와 같은 기사를 보았다. 오,
서남표 총장이 사과를?
최근에 연이어 일어난 자살사고에 뭔가 깨달은바가 있었나보군. 카이스트도
이제 좀 변하는 건가? 이런 순진한
마음 +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클릭했다.
근데 화면에 뜬게 앗, 젠장 중앙일보다. 똥 밟은 심정이지만 그래도 일단 내용은 읽어보았다.
서남표(사진) KAIST 총장은 5일 최근 잇따른 학생들의 자살과 관련, “고인의 가족, 친구 그리고 국민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KAIST에서는 1월 8일 1학년 조모(19)군이 성적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올해 들어 학생 3명이 자살했다. <본지 4월 1일자 18면>
서 총장은 이날 KAIST 사이트에 올린 ‘KAIST 가족 여러분께-A message from the President’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올해 KAIST는 유난히 슬픈 사건을 많이 겪고 있다”며 “우리가 좀 더 많은 노력을 했다면 소중한 생명을 잃는 비극적인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서 총장은 “KAIST나 하버드대 같은 대학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 대학의 명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라 고 밝혔다. 그는 “KAIST는 학사, 상담, 생활, 학비 문제 등 학교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걸쳐 개선할 점이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 총장은 앞으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운영하고 있는 ‘즐거운 대학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입, 신입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등 자살 방지 예방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중앙일보 |김방현 |입력 2011.04.06 01:38
음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군, 하면서
무심코 넘어가려 했지만, 뭔가 좀 구린 냄새가 났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다룬 다른 신문의 기사를 살펴보았다.
헐... 역시나 편집의 달인 중앙일보. 중요한 대목을 빼놓으셨다. 빠진 부분은 아래와 같다.
그(서남표 총장)는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있는 일류 대학의 경우 개교 이래 학생들의 자살 사건은 계속 있어왔고 명문대학의 학생들은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있다"면서 "게다가 KAIST 교수님들의 학문에 대한 원칙과 학생들에 대한 높은 기대로 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부담감을 많이 갖고 있고 학생들 스스로도 취업 등을 준비하면서 재정적인 압박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KAIST나 하버드 같은 대학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 대학의 명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라면서 "학생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많이 갖고 있겠지만 이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며 그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KAIST는 학사, 상담, 생활, 학비문제 등 학교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걸쳐 개선할 점이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우리들 각자의 마음과 자세에 달린 만큼 미래의 성공을 위해 지금의 실패와 좌절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연합뉴스 | 박주영 | 입력 2011.04.05 19:07
사과? 저딴 걸 사과라고 부르는가?
중앙일보는 국어사전을 따로 만들었나보다. 저런 걸 사과라고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진정성도 없고, 반성도 없고, 죽은 학생들에 대한 제대로 된 공감도 없고, 무엇보다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개념조차 없다. 근데, 저런게 사과라고?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있는 일류 대학들은 개교이래 학생들의 자살 사건이 계속 있어왔다고?
그건 그렇다. 서울대도 그렇고, 미국의 명문대들도 그러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걸로 카이스트의 자살사고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싶었던 걸까?
명문대학의 학생들이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경쟁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받아들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은 우리들 각자의 마음과 자세에 달린 만큼 미래의 성공을 위해 지금의 실패와 좌절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조언(?)을 지금 우리보고 귀담아 들으라는 건가?
참담하다. 이게 우리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의 수장으로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니...
왼 닭 : 사과해!
오른 닭 : 뭘?
왼 닭 : 일단, 네가 대체 뭘 사과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걸 사과하렴.
서남표 총장과는 반대로, 같은 카이스트 출신의 정재승 교수는 이번 자살사고를 두고 그나마 진정어린 걱정과 조언을 내놓았다.
정재승 교수는 29일 자신의 트위터에 "어제 우리학교 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올해 들어 벌써 세번째. 학교가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라고 글을 올리며 최근 벌어진 학생들의 자살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정 교수는 이어 "이번에도 근본적인 대책없이 넘어갈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이라고 덧붙이며 "학교는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어야 한다. 그안에서 학생들이 학문의 열정과 협력의 아름다움, 창의의 즐거움을 배울수 있도록 장학금제도를 바꾸고, 교수-학생,학생-학생간의 관계를 개선해야한다. 카이스트가 "질책이 아닌 격려의 공간"이 되길"이라고 자신의 바람을 피력했다.
또 정 교수는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와 경쟁의 압력속에서 삶의지표를 잃은 학생들에게 교수로서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 뿐 입니다. 학생들의 일탈과 실수에 돈을 매기는 부적절한 철학에 여러분을 내몰아 가슴이 참담합니다. 힘들 땐 교수들의 방문을 두드려주세요. 제발"이라며 학생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당부의 말 또한 전했다.
마이데일리 | 유영록 | 입력11-03-30 18:15
정재승 교수가 바로 보았다. 문제의 본질은 경쟁에 경쟁을 거쳐 카이스트라는 최고의 교육기관에 입학한 인재들조차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와 경쟁의 압력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고 목적을 잊고 부적절한 철학에 내몰려 자살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타살을 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은, 정교수가 참담한 가슴으로 한 말이 겨우 "힘들 땐 교수들의 방문을 두드려주세요. 제발"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뭐, "서남표는 물러나라!"라고 말하긴 쉽지 않을테니 이해는 간다. 하지만, 학생들이 교수들의 방문을 두드릴줄 몰라서 안 두드리는걸까?
어차피 말해도, 이제 다른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기준에 의해, 평가에 의해 다른 누군가와의 경쟁에 내몰리는 것이 지쳤다고 말해도, 그 무엇도 바뀌지 않으리란 절망이 가슴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 죽는가?
욕망을 잃었을 때 죽는다.
더 이상 상승하려는 의지를 잃었을 때 죽는다.
빛이 바래어서 죽는다.
-김동렬-
경쟁으로는 인간을 상승시키지 못한다.
2등까지는 어떻게든 바둥바둥거리며 올라가게 하지만, 결코 최고의 자리엔 오르진 못한다.
경쟁력이 떨어져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자리는 비교를 불허하는 존엄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경쟁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한다는 것이며, 비교할 때의 그 기준은 내 안의 것이 아니라 바깥의 것을 빌어다 쓴다. 바깥의 자를 빌어쓰는한 그는 영원히 비교를 '당한다'. 운이 좋아 반에서 1등을 하면 전교 1등이 기다리고 있고, 전교 1등하면 그다음엔 시군구 1등, 그 다음엔 도내 1등, 그 다음엔 전국 1등, 그 다음엔 세계 1등, 그 다음엔 우주 1등, 그 다음엔? 하느님이랑 1등 자리 두고 맞짱 뜰건가?
그 전에 인간은 죽고 만다. 아득바득 사다리 윗단까지 올라가려 하지만, 그 위엔 자신이 찾던 빛나는 별이 없음을 알기에 그만 절망하여 죽고 만다. 허무해서 죽는다.
경쟁을 열렬히 지지하는 하비 루벤 같은 사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쟁을 하는데 뛰어난 많은 사람들이 그 목표를 달성하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더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오히려 목표가 멀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승리가 사실 공허한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이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경험하는 가장 충격적인 일이 된다."
-책 <경쟁에 반대한다> 151쪽-
애당초 인간의 상승 의지는 공동체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데서 나온다.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가족의 중심에 서고, 친구들과의 우정의 세례를 흠뻑 받으며 무리의 중심에 서보고, 동료들과 열정적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협력하면서 일의 중심에 서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위험이 닥치면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서서 역사 앞에 거룩한 분노를 실천해 사회의 중심에 서고, 공감을 확장시켜 마침내 전체 생물권까지 감싸안아 '풀한포기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의 가운데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서 진정한 상승 의지가 나온다.
그러나 경쟁은 결코 상승의지를 낳지 못한다. 경쟁으로 가능한 것은 겨우 상승 의지라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이의 그림자만 쫓는 것일뿐. 누가 더 그림자에 가깝게 갔는지를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사다리의 윗단까지만 갈 수 있을 뿐. 사다리를 타고 별을 딸 순 없다. 별은 감히 사다리로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다. 그 별은 인간의 가슴에 상승하려는 의지로 빛나고 있으며, 그 빛이 바랠 때 인간은 죽는다. 그 빛을 기어코 죽이려는 자들이 있다. 서남표 총장은 그들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은 사다리 윗단에 서서 아랫단에서 열심히 기어오르는 자들을 향해 말한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경쟁은 인간의 본성이야"
"경쟁을 피하는 자는 경쟁을 두려워하는 거야"
"열심히 경쟁하면 너도 사다리 윗단에 오를 수 있을 거야"
"경쟁을 이겨내면 너는 강해질 거야"
.........
그렇게 <낡은 세상Old World>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안다. 젊을수록 더 잘안다. 나이든 사람들이 아무리 이 미친 세상을 정당화하려 애를 써도, 아직 영혼의 촉수가 살아있는 아이들은 온몸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절규하고, 마침내 온몸을 던져 자신의 촉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만다.
세상은 원래 그렇지 않으며, 경쟁은 인간의 본성도 아니고, 경쟁이 두려워서 경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나은 방법이 있기 때문에 경쟁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열심히 경쟁하면 사다리 윗단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 아랫단에 있는 사람들을 짓밟는 것이며, 경쟁을 이겨내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의 진정한 상승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서남표 총장은 말했다, 앞으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운영하고 있는 ‘즐거운 대학생활’ 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입, 신입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등 자살 방지 예방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그래, 그것도 필요한 일이다. 상담 전문가들, 정신과 의사, 임상 심리학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자살방지예방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진짜 예방책은 따로 있다.
바로, 서남표 총장, 당신이 나가야 한다. 당신이 나가고 그 자리에 '경쟁'이 아닌 '배움을 향한 열정을 바탕으로 교수/학생, 학생/학생 간의 협력을 통한 집단지성의 구축'을 토대로 한 진정한 학문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지닌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 학점 따위로 인간을 길들이려 하는 자는 필요없다. 장학금이란 푼돈으로 인간을 개처럼 만들려는 작자는 필요없다. 그런 식으로 자살은 예방되지 않는다.
우리가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힘을내렴, 세상이 원래 그렇단다. 그러니 어떻게든 힘을 내서 잘 살아보자꾸나" 식의 메시지를 던지는 한,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진정한 변화없이 개인의 변화를 요구하는 한, 절망은 계속되고, 자살도 계속 된다.
대부분의 자살은 사회에 의한 타살이다. 자살은 공동체의 책임이다. 공동체의 중심으로 어떻게든 나아가려는 한 개인의 마음에 학벌, 인종, 성별, 계급, 성적 등 온갖 콘크리트벽을 쌓아 옴짝달짝 못하게 만들면, 그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타살이다.
서남표 총장에게 말한다. 당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카이스트 구성원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당신들이 너무나 열심히 일해서, 너무나 열심히 학생들을 못살게 들볶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 제발 노력하지 말아라. 사다리를 열심히 정비해서 미끄러져서 죽거나 다치는 학생이 없게 하겠다는 식의 개혁은 때려치워라.
그냥 죽음의 사다리를 당장 치워버릴 것을 권한다. 아니, 권한다는 말로는 너무 약하다.
지금 당장, '경쟁'이라는 죽음의 사다리를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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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반대한다 1편: 경쟁은 무의식이다
1. 왜 경쟁하는가?
"왜 경쟁하는가?"
"도대체 왜 경쟁하는가?"
조용히, 위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잔잔하던 마음의 수면에 파장이 일어날 것이다 . 그것은 마치 "나는 왜 숨을 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숨을 쉬었고, 지금도 쉬고 있고, 앞으로도 쉬듯이, 우리가 경쟁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해 보인다. 이것에 대해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심지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경쟁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마치 '공기'와도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은 공기도 아니고 결코 자연스럽지도
않다. 경쟁이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그 속에서 당신의 지위와 보상이 결정되는 것이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경쟁이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경쟁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우리는 경쟁을 거부하는
쪽에 가까웠다. 한 번 떠올려보라. 우리들 대부분은 어린시절
승패가 갈리는 게임을 하다가도 패자가 되어 슬퍼하는 친구를 보면 게임의 룰을 기꺼이 바꿔가면서까지도 친구가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배려하였으며, 설령 친구가 여전히 승부에 불복하고 게임을 거부하더라도 승패가 갈리지 않는 다른 형태의 놀이로 유연하게 전환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경쟁을 완전히 내면화하기 이전의 우리는 경쟁보다는 협력을, 나에게 진 친구의 모습을 보며 기뻐하기 보단 함께 누리는 기쁨을 더욱 가치있게 여겼다.
올릭은 또한 아이들이 협력적인 게임을 할 때 더 행복해 한다고 썼다. "스스로 선택하게 하자 9~10세 남자 아이들의 2/3과 모든 여자 아이들은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놀이보다 모두 지지 않는 놀이를 택했다".............
아이들이 협력을 배울 수 있으며,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면 협력의 방식을 더 선호한다는 이러한 연구 결과는 경쟁이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는 증거로 매우 설득력 있다.
-책 <경쟁에 반대한다> 50페이지-
아직 사회의 경쟁 구조를 교육을 통해 완전히 내면화하지 않은 아이들은 '공동체'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나와 같이 놀이를 즐기는 상대방의 패배도 나의 패배처럼 여기고, 상대방의 슬픔을 마치
내 것과도 같이 느낀다. 아직 교육이란 이름의 숱한 경쟁과 서열 확인 작업을 거치지 않은 터라, 아이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난 '공감본능'을 활용하여 놀이의 규칙을 패한 친구에게 유리하게 바꿔가면서까지 경쟁 구조의 압박을 완화시키거나 아예 승패가
없는 놀이로 전환해버린다.
이는 아이들이 즐기는 것이 승부가 아니라 놀이를 통한 친구와의 상호작용 및
그로 인한 정서적 교류, 관계 맺기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배타적인 상호 목표달성을 특징으로 하는 경쟁구조가 친구와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의 유지에 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가차없이 경쟁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특별히 순수하고 착한 존재라서 그런게 아니다. 그건
우리의 마음이 애초부터 '공동체'를 지향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공동체' 지향성 및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공감본능' 이란 메커니즘은 '낡은 세상의 체제(Old World System)' 하에선 철저히 한정되고
왜곡되고 위축된다. '경쟁'은 세상의 진보와 더불어 점점 더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낡은 체제의 대표적인 도그마 중 하나이며,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외의
대안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주기도문' 이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외치듯, 자본주의의 경쟁 구조라는 하늘은 이제 인간의
마음이라는 땅에서도 철저히 내면화되어, 우리는 '경쟁력'을 갖춰 남보다 앞서고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 '자기계발서'의 주문들을 되뇌이며, 하루하루를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살아가는 군상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군상들이 바로 우리다.
2. 경쟁의 본질
우리가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경쟁을 하게 되었는가를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경쟁의 정의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필자가 생각하는 '경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경쟁은 원래 인간의 공동체 생활에서 '특정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대인 사이에서 또는 복수의 공동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행동양식/구조이다. 경쟁은 본래 한정된/부족한/희소한
자원을 둘러싸고 개인 또는 집단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구조화된 행동 양식이기 때문에 누군가 2/3을
차지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1/3을 차지할 수 밖에 없는 상호배타적인 목표달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경쟁의 본질은 간단하다. 무언가가 희소하다고 여겨지면,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무언가가 한정되어 있다고 여겨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 을 한다. 어떤 자원이 넘친다면, 도무지
그걸 두고 경쟁할 이유 따윈 없다. 태양빛을 두고 경쟁하는 바보는 없다.
그냥 나가서 햇볕을 쬐면 그만이다. 내 앞에 콸콸 흐르는 맑은 계곡물을 두고 옆 친구의
수통을 탐하는 바보는 없다. 그냥 계곡물을 떠마시면 그만이다.
경쟁이 성립하기 위한 필요 조건 1번은 바로 '자원의
희소성' 이다.
그러나 유념하자. 자원이 희소하다고 해서 반드시 경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원의 희소성이 곧 경쟁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원이 아무리 희소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상호 협의를 통해 기준을 만들어 자원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최대한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분배'하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저녁 때가 되어 먹을 것이 없어 고민할 때, 한 어린아이가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사하였다. 그리고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어 큰 무리로 먹게 하였는데, 5천 명(여자와 어린이는 뺀 숫자)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것이다.
[출처] 오병이어의 기적 [五餠二魚─奇蹟 ] | 네이버 백과사전
혹자는 위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두고 말그대로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발현으로 해석하지만, 필자는 이를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가 5천명이라는 구성원들이 만족할만한 '분배의 기준' 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매우 희소한 자원을 '경쟁' 없이도 성공적으로 나눌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수가 실제로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알수없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공감본능을 극대화한 사례라면, 아마도 예수가 오병이어를 그 상황에서
가장 그것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를 어떤 강제나 협박이 아닌 사랑의 '말씀' 을 통해 이뤄내 순식간에 5천 명의 개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리라.
다시 '자원의 희소성'이라는 필요조건으로 돌아가보자. 여기서 말하는 '자원의 희소성'은
실제 상황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원의 희소하지 않은데도 희소하다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 자원의 희소하다는 믿음이 경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얘기다.
빵이 10개가 있는데 9개를 감춰놓고 1개만
있다고 뻥을 쳐서 배고픈 사람들이 빵 하나를 놓고 피튀기게 싸우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경쟁사회인 것은
한국인이 유달리 경쟁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나눠줄 9개의
빵을 뒤로 숨겨 소수가 나눠먹고, 나머지 1개를 가지고 다수에게 던져주기 때문에 그 1개를 두고 경쟁이 그토록 치열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이 무한한 것이라고, 사랑은 한정되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도
그렇게 노래하고 성인들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부모님들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가? 우리 시대에 사랑만큼 한정되고 구속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은 없다. 우리들
대다수가 경험한 부모의 사랑이 그러했고 연인과의 사랑도 그러했으며 자식과의 사랑도 그러했다. 다들 사랑이
무한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이는 없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조건적인 사랑' 속에서 양육되었으며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고 긍정되고 수용되는 경험을 한 적이 극히 드물다. 부모에 의해서도 형제 간에 혹은 '엄친아'와의 끊임없는 비교가 이뤄졌으며, 학교에서는 성적이라는 이름으로
평가받았고, 직장에선 연봉으로 비교당했다.
끝없는 비교 속에서 우리의 존엄은 형편없이 구겨졌으며, 우리의
가슴을 타고 흘러야 할 바다와도 같은 사랑은 이제 가끔씩 운이 좋으면 새어 나오는 수도꼭지의 물 한 방울이 되어버렸다. 사랑이라는 무한한 자원이 낡은 체제 하에선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 이제
예술가나 철학자, 성인들이나 무모하게 달려들어 캐내는 폐광이 되었다.
폐광이 된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사랑의 무한성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한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희소자원이 된 사랑을 두고 모두가 경쟁에 뛰어든다. 부모의 조건적인 사랑이나마 받기 위해, 선생님의 인색한 칭찬이라도 듣고자, 동료들의 제한된 존중이나마 받으려
모두가 경쟁에 뛰어든다. 1등을 하면 그만큼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겠지란 믿음 속에 불나방처럼 잘도
뛰어든다.
그러나 그 어떤 1등도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다. 그 어떤 1등도 진정한 존엄에 이르지 못한다. 애당초 인간 정신의 존엄성이 경쟁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서 어떠한 일거리를 얻어오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인간이 60억 인류를 대표하여 신과 단독자로
마주하여 신 자신이 풀수 없어 인류에게 떠 맡긴 문제의 답을 내놓는데서 확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경쟁의 본질이란 문제로 돌아와보자. 앞서 말한 것처럼 경쟁은 자원이 부족한 상황 또는
자원이 부족하다는 믿음에 의해서 성립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경쟁이 성립하기 위해선 앞서 말한 필요조건 1 외에도 한 가지 필요조건이 더 필요하다.
경쟁의 필요조건 1: 자원의 부족함/한정/희소성 또는 그에 대한 믿음
경쟁의 필요조건 2: 경쟁의 대안 부재에 대한 믿음
앞서 필요조건 1은 설명했으니, 이제 필요조건 2를 살펴볼 차례다. 경쟁이 성립하기 위해선 경쟁의 대안이 부재해야
한다. 아니, 경쟁의 대안이 없다고 믿어야 한다. 이 경쟁의 대안이 없다는 믿음이 피드백되어 경쟁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한국의 교육제도를 예로 들면 이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한국 교육 시스템의 핵심은 '경쟁을 통한 서열화'에 있으며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교육 개혁 시도는
이 본질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한 채 사교육 시장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한국 교육 정책의 입안자
및 학부모들의 절대다수가 여전히 '경쟁'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교육의 성과를 평가하고, 학습 동기를 불어넣는데 있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근거없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필자는 이것을 '미신'으로 간주한다. 그
근거는 이어지는 연재물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이들은 경쟁을 떠난 교육체제를 상상하지 못하며, 상상한다 하더라도 그 상상을 현실화하려면, 교육시스템 전체를 들어내고 다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압박감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경쟁을 기초로 한 교육이 분산 에너지의 확산과 공감 능력의 심화라는 문명의
방향성을 따라 따라잡지 못하고, '근대'와 더불어 도태 될 것이란
점을 애써 외면한채 그렇게 자신들의 의사결정의 편의만을 추구하며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다.
경쟁의 필요조건 1,2 가 어우러져 경쟁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 혹은 그에 대한 믿음과 경쟁의 대안이 부재하다는
믿음이 결합되어 '경쟁'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낳는다. 이 두가지 조건이 성립되면, 혹은 이 두가지 조건을 사람들이 '믿으면' 그때 경쟁은 어쩔 수 없는 것, 피할 수 없는 것,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되어 마침내 인간의
본성, 혹은 신의 섭리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그 정도 되면
아래처럼 경쟁이라는 복음의 전도사 역할을 맡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다.
공병호씨는 교육문제 해결의 지름길은 경쟁논리 확대에 있으며,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소수인재를 위한 시스템으로 교육을 바꾸자고 주장해왔다.
-한겨레 21 기사 교육부는 신자유주의 돌격대? 중에서-
공병호씨처럼 입만 열면, 경쟁 경쟁을 외치며 개인이 경쟁력을
갖추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선전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들은 그로 인해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엔 무감각하다. 이미 자신들은 충분히 '경쟁력'을 갖췄다고 믿기 때문인걸까? 아무튼 그런 그들의 저서를 열심히 읽으며
오늘도 어제보다 나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자격증에 토익에 해외연수에 여념이 없는 이들은 경쟁엔 점점 능하지만 타인의 고통엔 무감각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뒤로 하고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경쟁을 향해 질주하게 된다.
3. 경쟁은 무의식이다.
우리는 부모, 학교, 직장 등 사회 공동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의 성공이 곧 친구의 패배이고, 친구의 성공이 곧 나의 패배인 상호배타적인 목표달성의 경쟁 구조 속에 편입되어 끊임없이 비교되고, 순위매겨지고, 가치평가되고, 보상받아
왔다. 우리는 그 속에서 경쟁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경쟁은 결코 '의식적'인 것일 수 없다. 우리에게
경쟁과 협력 사이에서 제대로 된 선택권이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애당초 우리에게 경쟁을 거부할
권리 따윈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이 '희소하고', '한정되고', '조건적'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길러진 부모 밑에서 양육되면서 그렇게 위축되고 왜곡된 사랑과 관심이라도 얻기 위해 1등을 향해, 100점을 향해, 금메달을 향해,
상장을 향해 시험장/콩쿨/컨테스트/스포츠 등 경쟁의 무대로 나아갔다.
경쟁에서 승리를 하면 사랑과 관심, 인정이라는 정신적인 보상과 상금, 상품 등의 물질적 보상까지 받고, 패배하면 기껏해야 위로 밖에 받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당신은 '사랑'받을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기꺼이 경쟁의 무대로 뛰어든다. 그러나
당신은 애당초 사랑이 무한하며, 무조건적이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한정되지 않는 것이란 걸 결코 알지 못한다.
당신은 대학과 학과에 서열을 매겨놓고, 그 거대한 위계질서 속에서 아이들을 '수학능력'에 따라 분류하고 할당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개인당 1평도 안 되는 공간에 인간을 가둬놓고 온갖 지식을 쑤셔넣는 것을 '교육' 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친구들과의 끝없는
경쟁을 강요 받았다. 선생들이 매기는 등수에 지친 아이들은 성적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별도의 위계질서들을
싸움실력, 언변, 미모, 운동
실력 등의 비교를 통해 만들어보지만, 결국 고3이 되면 '수능'이라는 거대한 경쟁의 물결에 휩싸여 버린다. 대안 교육이란 이름이 아직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결국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모든 교육이 '대학'으로 수렴된다.
제도권 교육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더라도 혹은 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대입이라는 경쟁을 통과했다손 치더라도 ,
그걸로 경쟁은 끝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경쟁을 벗어날 수 없다. 이젠 취업이라는 경쟁의 무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 속에서
당신은 계속해서 자신이 사회에 쓸모있는 존재임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임을, 나아가 조직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임을 입중해야 한다.
물론 취업을 해도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돈을 모아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나면 이제 정말로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돌입해야 한다. OECD 국가에서도 손꼽히는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왼손엔엔 생존의 바이블인 자기계발서, 오른손엔 24시간
업무도구인 스마트폰을 들고 출근길에 올라 직장이라는 경쟁 무대로 향한다.
이런 우리에게 경쟁은 차라리 '무의식'이다.
구조론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축을
타고 움직이며 일한다. 구조론 마음이론에서, 정신은 외부환경에서
일거리를 얻어오면서 존엄을 지향하며, 의식은 일거리를 내 마음 안으로 들여와 자유를 통해 자아의 영역을
확보한다. 의도는 일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기 위해 포지션을 선점하려 들며, 생각은 일상의
활동을 통해 실제로 일을 행하고, 감정은 일의 결과를 점검하고 평가하여 우리에게 일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실시간으로 피드백해준다.
경쟁은 이러한 인간 마음의 구조에서의 상부구조 정신-의식-의도를
왜곡시킨다.
정신은 마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외부환경에서 에너지를 조달하는데, 경쟁은 나와 외부환경
사이에 불필요한 경계선을 그어 에너지를 제한한다. 경쟁은 불필요하게 외부환경과 대립하면서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외부환경을 적대시하면서 스스로 에너지 공급원을 차단해버린다. 쉽게 예를 들자면, 경쟁에서 1등을 하기 위해 친구들과 자신의 학습 방법과 이해한 내용을
공유하지 않고 혼자서만 열심히 공부하지만, 결국 스터디 그룹을 이뤄 서로의 학습 방법과 내용을 공유한 아이들에게 뒤쳐지고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인간의 마음에서 정신은 어떤 외부의 상황과 최초에 맞닥뜨렸을 때 작동하여 한 번 세팅되면 그 다음부턴 비슷한 상황에선 반복적으로 써먹게
된다. 경쟁에 대한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부모에
의해 경쟁 구조를 접하여 이를 정신을 통해 들여올 땐 의식적으로 경쟁 구조를 점검할 수가 없다. 아이에겐
부모가 강요한 경쟁 구조가 부당하다는 느낌은 있으나 이를 표현할 방법이 거의 없으며, 설령 표현한다
할지라도 부모는 이를 아이의 어리광으로 알고 무시하기 일수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누구나 최초 경쟁구조
속에 강제로 편입될 때 이에 대해 울음이나 짜증, 분노의 형태로 표현한다. 이는 아이를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여 혼내거나 무시했을 때, 아이가 보이는 반응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경쟁 구조를 당연시 여기는 부모들은 이러한 아이의 반응을 산뜻하게 무시하고,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으로
계속해서 아이에게 경쟁 구조를 강요하며, 이것이 부모에게 자신의 생존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아이들에게 한 번 각인되면, 이후 아이의 의식-의도-생각-감정은 한 번
세팅된 경쟁 구조를 따라 작동하게 된다.
최초 부모가 외부 환경의 경쟁 구조를 아이에게 끌어와 정신에 세팅시켜 놓으면 이후의 의식-의도는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전개된다.
정신: 부모에 의한 경쟁 구조의 내면화. 이를
아이는 '의식적'으로 거부하지 못한다. 아직 아이는 경쟁 구조에 대한 감정적인 거부의사(싫어!)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 경쟁 구조 자체를 의식하고 이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히진 못한다. 인지능력, 특히 언어적 표현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들도 자신에게 강요된 경쟁 구조가 부당하다는
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말을 조리있게 못할 뿐이다.
의식: 경쟁적인 자아 혹은 경쟁을 두려워하는 자아. 한
번 경쟁 구조가 정신에 세팅되면 이후에 아이의 정신이 물어오는 일거리는 주로 경쟁적인 활동들이 된다. 정신이
무언가 서열이 매겨지고, 순위가 매겨지고, 점수가 매겨져 타인과 비교되는 활동들을 물어오면, 이를 반복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성공 또는 실패를
겪게 되며, 아이의 능력과 주변의 지지 수준에 따라 겪는 성공 및 실패의 빈도수가 달라진다.
성공을 보다
많이 겪은 아이들은 경쟁적인 자아가 되어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로부터 오는 긴장과 보상을 즐기게 되지만, 실패를 보다 많이 겪은 아이는 경쟁을
두려워 하고, 그로부터 오는 긴장과 보상 받지 못함을 두려워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경쟁 구조에 아이가
노출된 이후 아이의 정신이 협력적인 외부 환경과 접촉하지 못하면, 아이의 협력적인 자아 역시 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식은 정신이 물어온 일거리에 유기체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의사결정의 축이며, 이 축은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타격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가 협력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외부의 교육 환경이나 양육
환경에 노출되지 않으면 아이가 향후 타인과 원활하게 협력하며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의도: 의식에서 세팅된 자아에 따라 의도에선 자신의 포지션(역할)을 정하게 된다. 외부
환경의 경쟁 구조에 이미 세팅된 승자/패자 구도에 따라 자아는 경쟁 경험을 반복적으로 쌓으면서 그 빈도에
따라 자신을 승자 혹은 패자로 설정하게 된다. 한 번 자아가 승자 혹은 패자로 설정되면, 승자는 계속해서 이겨서 공동체 내에서 보다 높은 지위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품게 되며, 패자는 자동적으로 승자보다 낮은 지위를 점유하게 되며, 패자 역할에
따르게 된다.
경쟁 구조에 주로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의도 수준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정할 때 타인과의 비교에 의한 상대적 우위에 서려하며 이는
공동체 내에서 끊임없이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쟁적 의도는 개인에게 '비교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무의식적인
압력으로 나타나며, 이는 경쟁을 근간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 대다수가 앓고있는
일종의 신경증이다.
*이 대목에선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경우를 한 번 떠올려보자. 우리는
누구나 쓸데없는 호승심에 타인과 갈등을 빚은 경험을 갖고 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인 의도에 조종당해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이기고 상대방보다 우위에 서려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예 자신의 캐릭터를 '패자'로 설정하여 경쟁을 회피하고 공동체 내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자동적으로 승자의 밑으로 고정시켜 놓고 더 이상 포지션 이동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경쟁의 대안도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사회적으론 저소득층 및 빈곤층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그 유명한 '학습된 무기력' 이란 개념은 바로 이러한 의도 차원의 '패자' 설정을 의미한다.
이처럼 경쟁은 마음의 상부구조인 정신-의식-의도를 거쳐가며 마음 깊숙히 자각되지 않은 채 '무의식'으로 남게 된다. 연인이랑 가볍게 시작한 게임이 어느새 상대를 이기기 위한 작은 전쟁으로 변한 경우, 나도 모르게 강사의 안내에 따라 타인과 박수 큰소리로 치기 경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 자신도 모르게 내 차를 앞서 나간 이를 추월하려 무리해서 과속을 하는 경우, 우리는 바로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경쟁' 이란 무의식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무의식'이 문제다. 탐진치 삼독의 뿌리가 무명, 밝지못함, 인간의 의식하지 못함에서 비롯되듯, 경쟁이라는 문제의 근원은 사실 '무의식'에 있다. 어린 시절, 아직 어른들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고 자신의 의사를 조리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의 양육, 공동체의 교육에 의해 경쟁을 주입받은 것이 문제다.
비극은, 우리가 이 경쟁의 대안 없이 '경쟁 위주로' 주입받았다는 점에 있다. 경쟁 외에도 외부환경에서 일거리를 내 마음 안으로 들여와 일하는 대상과 관계를 긴밀해 맺고 일을 행해 그 결과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러한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그러한 방법이 실천되는 외부 환경에도 제대로 노출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은 우리에게 깊은 무의식으로 남아버렸다. 부모에게서 아이에게로, 다시 그 아이가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로 넘겨주는 거대한 무지. 그 대를 이은 무지로부터 마침내 현대판 신화가 하나 탄생했다.
바로, 경쟁이라는 신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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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다음편은 "경쟁은 신화다"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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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가수다?
슈퍼스타 K 에서 시작된 서바이벌 광풍이 결국 공중파에도 도달했다. MB 집권 이후 제대로 맛이 간 듯한 엠비씨는 아예 서바이벌에 사운을 건듯하다. 위대한 탄생부터 신입사원, 그리고 나는 가수다까지, 아주 경쟁과 서바이벌의 전도사 노릇에 앞장서고 있다.
그 중 백미는 아마도 "나는 가수다"가 아닐까 싶다. 슈퍼스타k 같이 '인생역전극'도 아니고 위대한 탄생처럼 '성장물'도 아니다. '최고'의 가수들을 모아놓고 청중들의 '평가'에 따라 1등에서 7등까지 순위가 매겨지고 그 중 7등이 탈락한다는 '서바이버물'이다.
이런 서바이버물에 제 정신 박힌 가수들이 출현 할 리가 만무하다. 그것도 정상급 가수들이 이런 컨셉에 동의할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굳이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을 할 필요가 없는 가수들, 공연을 통해, 음반을 통해서도 충분히 밥벌어먹고 사는 가수들이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서바이벌이란 무자비한 경쟁에 뛰어들겠는가?
그래서 였을까? 대단한 떡밥을 걸었다. 1등을 다섯번 이상 하면 일요일 황금시간대에 무려 '단독' 공연을 열어준단다. 이는 '나는 가수다' 출연진들 중 오직 김건모만이 전성기에 한 번 경험한 대단한 영광이다. 시청률이 20%가 나온다고 치면 물경 800만 시청자를 앞에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기회를 얻는 것이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가장 큰 무대에 서 보고 싶은 꿈. 그 꿈을 이용하여 정상급 가수들을 낚았다. 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가수들의 꿈을 이용해 마침내 살아남을 필요없는 이들을 살아남아야만하는 무대로 이끌었다. 참으로 교묘하다.
물론 피디가 주장하는 명분은 제법 고상하다.
김영희PD는 “출연가수 모두 대중이 평가하는 것에 대해 긴장과 부담은 되지만 그 결과에 대해 수긍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수나 음악을 서열화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대중의 평가는 가수들이 참조할 만 가치가 있는 반응과 관심의 척도다”고 설명했다.
‘나는 가수다’의 기획의도와 목적에 대해 김영희PD는 “출연가수들과 같은 심정이다. ‘나는 가수다’를 통해 노래와 음악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가수다’에 가수들이 출연한 목적이고 내가 연출하는 의도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질은 이거다
“‘아이돌 그룹들과 댄스 음악으로 편향된 방송 가요계에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는 무대! 진짜 가수들이 설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가창력을 소유한 레전드급 가수들의극한 서바이벌!”
이 말 역시 제작진이 밝힌 기획의도다.
결국, '나는 가수다' 의 본질은 경쟁과 보상, 그리고 서!바!이!벌!이다. 마침내 경쟁이라는 신화는 더 이상 ‘인간(아마추어)’과 경쟁할 필요 없는 ‘신(프로)’들마저 티비라는 검투장으로 불러들였다. 콜로세움의 재현이다. 피만 안 튀겼지, 그 긴장감은 검투장의 그것과 똑같다. 내가 이기면 네가 죽고, 내가 죽으면 네가 산다.
노래 좀 부른다 싶은 가수들을 모아 1등부터 7등까지 줄세운다. 노래실력으로 치면 어디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등수발표에 긴장하고 초조해하고 희노애락을 오고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리고 그러한 가수들의 표정변화에 따라 마찬가지로 희노애락을 오고가며 티비 앞에 앉아있을 수백만의 시청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자니, 새삼 이 "경쟁"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깊숙히 파고들이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개인의 마음에, 집단의 마음(문화)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낡은 세상의 시스템 속에 경쟁이 너무나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물의 존재를 잊은 물고기처럼 그렇게 경쟁을 당연시하고 심지어 숭배까지 하면서 살고 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놀면서도 우리는 경쟁을 하고 순위를 매기고 등급을 매기고 승자에겐 보상과 영광을, 패자에겐 상처와 굴욕을 안겨준다.
2.어째서 그는 행복할 수 없는가?
경쟁이 우리 안에 너무나도 깊이 파고든 터라, 어떤 사람들은 마침내 경쟁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사람들의 머리 속엔 경쟁 자체에 문제를 제기할 여지는 전혀 없이 오로지 경쟁에서의 '승리'만이 남게 된다. 경쟁이 '구체제' 속에서 학습된 것임을 망각한 채 그렇게 '남들보다'라는 비교의 주문을 되뇌며 한치라도 사다리의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 바둥거리고 또 바둥거리게 된다. 그러나 경쟁은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 아니다.
경쟁을 통해 마침내 남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된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분명히 말한다. 예외는 없다.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어째서 그는 행복할 수 없는가?
인간의 마음에 대한 구조론의 언어를 빌어 말하자면,
존엄의 대지가 훼손되었고, 자유의 바람이 불지 않으며, 사랑의 강이 메말랐고, 성취의 나무가 시들었고, 행복의 열매가 썩었기 때문이다.
경쟁 속에서 인간의 마음이 제대로 일하지 못하고 낳지 못하고 창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경쟁이 인간의 '공감본능'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이것이 인간의 공동체 지향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에 답하기 위해 앞으로 이 <경쟁을 반대한다> 시리즈를 통해 이를 하나씩 살펴볼 계획이다.
연재에 앞서 분명히 밝힌다. 이 글이 취할 입장은 경쟁에 대한 찬성은 물론 아니고, 부분적 혹은 조건적 찬성 또한 아니올시다이다. 이 글은 경쟁에 대한 '무조건' 반대라는 관점에서 쓰여질 것이다. 경쟁에 대한 어떠한 합리화라도 그것이 '근거없음'을 폭로할 것이다. 특히 심리학적 관점에서 경쟁이 얼마나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박혀 있는지를 폭로하는 것부터 출발해, 이러한 '무의식'이 자각되지 않은 채 남아 우리의 심신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경쟁'의 대안으로 '협력'에 대해 살펴보면서 이 연재글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미리 말하건대, 마음은 '경쟁'이 아니라 '경쟁'이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긴장감', ‘목표의식’, ‘동기’, ‘깨어있음’을 원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경쟁의 본질인 '상호배타적 목표달성'이라는 세팅 없이도 얼마든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 누구나 유년시절을 되돌아 본다면 다들 친구와의 경쟁보다 협력이 더욱 우리를 고양시키고 행복하게 만들고 놀라운 에너지를 부여했었음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 하나 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말그대로 '추억'이 되어버린 것이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경쟁이 두려워서 경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기면 네가 지고, 내가 얻으면 네가 잃고,내가 기쁘면 네가 슬프고, 내가 높이 올라가면 네가 아래로 추락하는 그런 구조 속에선 인간의 마음이 결코 온전히 기능할 수 없기 때문에 경쟁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마음의 결을 무시하고 나아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자연의 완전성과 어긋나기 때문에 경쟁에 반대하는 것이다. 물론 어째서 경쟁에 '무조건' 반대하는지에 대해선 글을 통해 충분히 근거를 제시할 계획이다.
앞으로 이 연재물을 요리하는 데 쓸 주 재료는 구조론, 빛의 길, 그리고 책 "경쟁에 반대한다"이다. 특히 경쟁의 네가지 신화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한 책, "경쟁에 반대한다"의 내용들을 주로 참고할 계획이다.이 글을 읽을 분들의 열띤 참여를 부탁 드린다. 기왕 경쟁에 대해 글을 쓰는 거, 독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종의 ‘협업’을 해보고 싶다.
그럼 다음 이 시간에 ‘1편: 경쟁은 무의식이다’로 찾아오겠다.
짧은 단상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가수다"는 프로그램의 핵심인 경쟁과 서바이벌 없이도 얼마든지 시청자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내부고발해버렸다. 정엽, 김범수, 박정현, 이 셋이 일구어낸 아름다운 하모니는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청자들이 2회의 명장면으로 뽑은 저 셋의 하모니는 우리에게 참된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진정한'긴장감'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예술이 인간을 긴장시키는 것은 자아를 타자와 소통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며, 타자의 발견이 낳은 긴장감을 아름답게 풀어내면 그게 바로 예술이다. 정엽, 박정현, 김범수가 그랬듯, 나와 다른 존재와 만나 그 낯섦과 긴장을 음악이라는 마당에서 아름다운 화음으로 풀어내면 그 풀어낸 크기만큼 우리는 긴장에서 이완으로, 호흡의 정지에서 다시 호흡의 시작으로 나아가면서 지극히 평안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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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부견자(虎父犬子)라는 말이있다.
호랑이 아버지 밑에서 개자식이 나온다는 말인데, 이게 생물학적으론 말이 안되지만 심리학적으론 상당히 일리있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호부 밑에서 견자가 나온다는 것일까?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살펴보자.
온갖 역경과 고초를 겪고 마침내 성공한 호랑이 아버지. 그의 자아는 강하고 튼튼하고 난공불락의 성과도 같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밀림에서 살아남았으며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다. 그의 밑에 딸린 사원들 수만 몇 천이고 재산은 삼대가 아니라 삼십대가 아무 일도 안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다.
그가 겪었던 모든 시련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호랑이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단 한가지만 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호랑이 아버지는 자문한다. "어떻게 내 밑에서 저런 개자식이 나온걸까?" "어떻게 저렇게 멍청하고 무능하고 비겁하고 나약한 놈이 태어난 걸까?"
자신이 평생 일구어놓은 XX 그룹을 물려주겠다는 생각은 이미 버린지 오래이다.
어렵게 얻은 자식이라 너무 오냐오냐 키웠던 것일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최고의 학교에 최고의 교육, 최고의 인맥에 최고의 부모. 아이의 어머니는 대학원 박사졸업을 할만큼 재원이었고 자신 역시 머리가 좋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부모의 머리를 이어받았으면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닐게다.
그런데, 이 개자식은 너무나도 멍청하다. 학창시절 성적도 그저 그랬고, 결국 유학을 보내 외국대학 졸업까지 시키진 했지만, 그 와중에 마약을 해서 그걸 덮느라 쓴 돈이 억단위였다. 이후 정신차린 듯 하여 큰맘먹고 계열사 중 하나에 상무로 임명해 나름 경영수완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건만, 아주 단기간에 장렬하게 말아먹었다. 도무지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주변의 멍청한 친구들 말에 혹해 우리 기업이 익숙치 않은 분야에 무리해서 진출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름 경영수업도 시킨 터라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컸다. 00그룹 딸과의 결혼생활도 뭐가 문젠지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한채 이혼으로 끝나버렸다. 이후로도 시도한 몇 가지 사업에서 신통치 않은 결과를 내놓으며 나를 실망시켰다. 차라리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딸들이 훨씬 똑똑했다.
호랑이 아버지는 고민이다. 과연 이 견자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려줘야 할 지 말이다. 분명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은 잡초같이 살아오면서 온갖 진창과 수렁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런 일을 자식에게 또다시 반복시킬 순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무엇하러 그런 고생을 반복시키겠는가? 물론 그런 고생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지만 굳이 그런 환경을 내 자식에게 경험시킬 필요는 없었다.
물론 자식을 엄하게 키우면서 나름 세상사의 어려움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높은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여러 상황도 겪게 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내 자식이 견자라는 사실을, 호부 밑에서 견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위에 가상의 이야기를 꾸며보았다. 가상의 이야기지만 저것과 비슷한 패턴은 현실에서도 쉽게 관찰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독재자 박정희의 아들이 그랬고, 재벌 2세들 중에서도 자살, 마약, 사업실패 등의 비운을 겪는 일이 있다. 과거 역사를 보아도 맹장 밑에서 또 맹장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고 영웅 밑에서 또 영웅이 나오는 경우 역시 드물었다. 왜일까?
뭐 이런 걸 정신역동적으로 해석하여 가부장적이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이 끝끝내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못한채 성기기에 고착되어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살아가다가 견자의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해석해서 재벌 2세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와 압박감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해 그렇게 삶을 불안하고 괴롭게 살아가는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겟다.
하지만 호부견자의 문제는 구조론 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더 잘 보이는 문제다.
구조론심리학으로 보면, 호부견자는 사실 "자아"의 문제이다.
자아. 근데 자아란 무엇인가?
김동렬: 그냥 먹고싶다 먹고, 자고싶다 자는게 아니라 내가 먹으면 상대는? 내가 자면 상대는? 이걸 계산하는게 자아인데, 자아는 여러 경험이 축적되어 성립합니다. 특히 위험에 대한 경험이죠. 뭘 했다가 잘못되어서 혼쭐난 경험이 인간을 긴장시키고 그 긴장의 강도에 따라 상대의 행동을 예측합니다. 혼쭐난 경험이 쌓이면 반사적으로 긴장하죠. 자신이 긴장해 있다는건 상대가 나를 공격한다는 신호. 그렇다면 대비해야 하고. 그러므로 행동할 때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들어가는 거.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그게 자아입니다.
구조론에서는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의 전개에서 두번째 의식이 자아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는 어떻게 할까를 보는 것이 의식이죠. 생각해서 보는게 아니고 긴장해서 보는 겁니다. 긴장하는건 마음에 데미지를 입어서 그렇죠. 자아의 크기는 좋고 나쁜 데미지의 크기입니다.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그 내 영역이 크고 약한 사람은 작죠. 내가 이렇게 하면 신은? 국가는? 정권은? 인류는?..이건 자아가 큰 거고. 내가 이렇게 하면 개는? 고양이는? 동팔이는? 친구는?.. 이건 자아가 작은 것.
호부의 자아는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의 가슴에 달린 훈장과도 같다. 그것은 숱한 격전과 사지를 헤쳐나가며 획득한 부산물이다. 그의 자아는 호목처럼 오밤중에도 번뜩이며 위험을 예의주시한다. 호부는 그의 성공을 획득하기까지 온갖 데미지를 입어왔으며 자아를 파수꾼삼아 위험을 예견하고 적절하게 외부의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왔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이를 자신의 후대에겐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신은 개같이 벌었으니 자식은 정승처럼 쓰기를 기대한다. 자신은 야생에서 자랐지만 자식에겐 최고의 온실을 제공해주려 한다. 여기에 예외는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호부들의 경우 외부 활동을 하느라 바쁜 나머지 가정의 문제, 특히 자녀 양육에 있어선 주도권을 '똑똑한' 배우자에게 맡김으로써 양육이라는 스트레스 만땅인 과업을 피하려 든다. 이 똑똑한 여인은 호부의 묵인 하에 자식에게 최상의 환경을 제공해주며, 자식은 그 속에서 무럭무럭, 그러나 속은 텅 빈 쭉정이로 자란다.
자신이 호랑이 같은 자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주변 환경의 위험성에 대한 깨어있음, 환경의 변화에 맞서 긴장을 끌어올렸던 것 덕분이라는 것을 망각한 호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견자를 위한 최상의 환경을 조성해준다.
견자가 되는 법은 간단하다. "가장 안락하고 위험이 없는 환경"을 제공해주면 된다.
유리로 막힌 온실에선 바깥의 태풍을 느낄 수 없다. 조금있다가 유리천장이 통째로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 위기에 처해있어도, 온실 안은 아늑하고 조용하고 평온하다. 이 온실 안에서 자란 견자는 호부의 생존법칙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지만 온실에서의 생존법칙은 잘 알고 있다. 온실에서의 생존법칙에 따르면 어렵사리 긴장하고 고민하고 판단하고 실천할 필요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최고의 혜택이 주어지고 가만히 있어도 욕망은 충족된다. 호부가 일궈놓은 부와 권력과 명예는 견자의 후광이 되어 견자는 그 빛의 온기를 마음껏 누린다.
세상의 냉혹함과 무서움을 온몸으로 헤쳐나가면서 얻은 자기 나름의 생존방법을 거의 '진리'로 여기는 호부는 틈나는대로 인생사의 어려움에 대해일장연설을 하지만, 견자의 귀엔 그야말로 개짖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견자는 아버지처럼 굳이 발버둥치며, 애쓰며, 고뇌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태어날때부터 주어진 성공의 길을 차근차근 별탈없이 통과해 해 나아가면 높은 학력과 고위직, 최고의 배우자가 보장된다. 그렇게 그들은 호부가 그랬듯이 외부 환경에 대해 긴장을 끌어올려 자아로 맞서고, 굳은 의지로 난국을 돌파할 필요가 없어진다.
호부와 호부의 배우자가 견자를 위해 설정한 "최상의 양육 환경"이 견자의 마음의 구조,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에서 정신-의식-의도를 무의식으로 만들어 버린다. 위험을 제거한 환경, 정해진 진로는 인간의 마음이 일할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 운이 좋아 온실 밖의 세상을 접했다 하더라도, 이미 긴장을 끌어올리는 법을 잊어버린 마음은 온실 밖의 세상을 그저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만 간주하고 다시 아늑한 온실로 발길을 돌린다. 견자의 무의식은 자신이 온실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호랑이의 눈을 피해 달아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 호랑이 눈은 바로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무서운 자신의 아버지, 호부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호부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몇 가지 일탈 행위를 해보면서 호랑이 눈을 피해 도망치려는 시도를 몇 번 해 보지만,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견자들의 주 레퍼토리인 마약, 이혼, 사업실패, 사기당하기 등은 온실 문을 열고 바깥의 세상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방식이 아니라 온실 내부에 집기들을 집어 던지면서 땡깡피우며 어리광피우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지만, 견자는 그런식으로라도 자신이 호부와는 다른 존재임을 알릴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온실 외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호부의 세계를 부정하고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호부의 "자아"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호부에게만 있으며 견자에겐 없다. 이것이 견자의 비극이자 호부의 괴로움이다. 호부는 견자가 자신의 책임인 것을 모른다. 자신이 제공한 최상의 환경이 실은 최악의 환경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신이 '자식'이라는 '외부 환경'에 대해 사업할 때 국내 정치나 세계 경제 흐름, 사업환경의 변화을 예의주시하는 것처럼 긴장하고 깨어있지 못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호부의 자아는 외부환경에서 주어지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해 단련되고 주조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스트레스에 굉장히 강한 터프한 존재라고 믿지만 자아가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식을 견자론 키우지 않겠다며 엄하게 다루면서도 정작 양육이라는 과업에 긴장하지 않고 자식의 진로를 미리 세팅해 놓은 채 양육에 대한 긴장과 부담은 자식의 어머니에게만 맡긴다.
그러나 자고로 어머니들은 자식을 최대한 위험에서 보호하는데 특화된 분들이니, 호부가 바라는 호랑이 같은 자아가 자라기 위한 거칠고 위험하고 온갖 스트레스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글 같은 환경은 견자에겐 결코 제공될 수가 없다. 그렇게 호부의 방임과 어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는가 충족되지 않는가만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마음의 일거릴 물어오지 못하고, 세상이 계속 진보라는 이름으로 일거리를 던져줘도 이를 담당할 자아가 없고, 갈림길에서의 판단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의도가 없다. 견자는 마음의 구조에서 말단 부분만을 일시키면서 호부의 자아의 부속품 노릇을 한다. 견자는 호부의 자아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것이 호부견자의 메커니즘이다.
Written by 오세
심리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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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란 무엇인가?
21세기는 창의의 시대라고 합니다. 다들 창의력이란 말도 많이 쓰고요. 하지만 창의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듯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올리듯, "그렇게 창의력도 열심히 뭔가를 하다보면 올라가겠지..." 라며 창의력을 길러준다는 온갖 방법을 시도해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창의가 무엇인지, 창의력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러한 모든 시도는 시간과 돈을 헛되이 낭비한 결과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운이 좋아 창의력이 정말 길러졌다 치더라도, 여전히 그는 타인에게 어떻게 창의력을 기를 수 있는 지에 대해선 말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창의란 무엇인가? 창의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 두뇌에 대한 잘못된 이해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흔히들 뇌를 개인의 두개골 안에 갇혀있는 회백질의 덩어리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가정 하에 우리는 창의를 개인의 두뇌를 쥐어짜서 나온 인고의 산물로 간주합니다. 머리에 힘을 주고 앉아서 고민에 고민을 반복하다보면 창의가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머리에 힘주고 앉아봤자 두통밖에 생기질 않습니다. 신통한 아이디어는 골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이디어는 바로 우리가 뇌의 바깥이라고 여기는 <환경>과의 교감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안쪽 <뇌>가 아니라 바깥 환경, 즉 <바깥뇌>와의 상호작용에서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바깥 뇌의 중요성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지금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아이폰, 바로 그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의 창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애플 제품의 특징은 바로 그 디자인, 특히 유선형,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제품에 활용한 것은 물론 잡스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곡선의 활용이 과연 잡스가 머리를 쥐어짜서 나온 결과였을까요? 머리를 마구 굴리면서 ‘요즘 시장엔 직선형 디자인이 넘치니 아마 곡선이 소비자에겐 신선하게 받아들여질거야’ 이랬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강박에 가까운 곡선 취향은 아마도 유년 시절 우연히 아름다운 곡선을 보고 거기에 사로잡혔던 강렬한 기억에 기반을 둔 것이며, 이러한 외부 환경과의 교감능력, 곡선에 민감하게 반응한 꼬마 스티브 잡스의 감수성이 훗날 애플의 디자인을 낳은 것입니다.
창의적인 음악가, 아마 다들 모차르트를 쉽게 떠올릴 겁니다. 모차르트는 물론 어릴 때부터 신동이었고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여지없이 발휘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들 그의 타고난 재능에만 주목하지 그가 누렸던 음악적 환경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 아버지를 따라 유럽 곳곳을 누비며 각국의 다양한 음악들을 섭렵할 수 있었고 특히 젊은 시절 빈으로 거처를 옮긴 후 다양한 음악가들과의 교류와 소통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위대한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모차르트가 다섯 살때부터 작곡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20세 이전에 쓴 작품들에 대해 대체적으로 음악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그의 천재성은 개인적인 영감의 산물이라기 보단 오히려 당시 시대의 다양한 음악적 흐름을 폭넓게 흡수하면서 그것을 소화하여 독자적인 스타일로 완성한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모차르트 역시 음악을 창의하는 과정에서 외부 환경, 즉 바깥 뇌를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바깥 뇌를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모차르트가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외부 환경의 자극과 그에 상응하는 개인의 민감한 센서가 서로 만나지 않으면 창의는 불가능합니다.
(모짜르트는) 실제로는 한번에 거침없이 작곡하는 것이 아닌 신중하고 노력하는 작곡가였으며, 그의 음악적 지식과 기법은 오랜 시간 동안 이전 시대의 음악을 연구함으로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 그는 젊은 시절에 당대 내려오던 작품들을 분석하지 않은 게 거의 없었다 할 정도로 엄청난 노력을 했으며, 한 편에서는 '표절의 천재'라는 비아냥과 오명에 대해 평생을 싸워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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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예로, 우리가 천재적인 화가, 창의적인 그림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반 고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그림은 실제로 당시 네덜란드로 수입되던 일본 판화인 우키요에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으며 파리 유학 시절 인상파 화가들과의 교류도 그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흐 그림의 특징인 강렬한 색채와 선명한 대비, 굵은 선은 그가 머리를 쥐어짜 생각한 것이라기 보단, 인상파와 일본 판화라는 바깥뇌와의 교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바깥뇌와의 교감 역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고흐의 미적 감수성이 유달리 예민했기 때문에 일본 판화와 인상파라는 외부 자극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화풍을 낳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창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앞에서 <바깥뇌>라는 개념을 끌어왔고 스티브 잡스, 모차르트, 고흐의 예를 들어보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바깥 뇌>, 즉 외부 환경과의 교감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낳기” 그것이 바로 창의입니다. 이러한 창의를 가능케 하는 두 가지 요소는 바로 외부 환경(바깥 뇌), 그리고 내부의 센서(감수성)이며 이 둘의 상호작용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이러한 창의의 정의로부터 우리는 창의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호의 칼럼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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