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는 없다.




흔히들 학급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얌전한 아이를 착한 아이라 부릅니다. 물론 더 나아가 선생님 심부름도 잘하고, 친구를 잘 배려하고 공부까지 잘한다면 정말(?) 착한 아이라고 부릅니다. 동학년 모임시간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착하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 아이는 정말 착한 것일까요? 어른식의 표현으로 하면 인격이 훌륭하고 선한 사람일가요?

 

착한 아이는 없습니다. 내성적인 아이, 남에게 피해를 잘 주지 않는 아이, 현재상태로 친구를 잘 돕는아이(이유가 칭찬을 받기 위해서든, 친구를 돕는 것이 좋아서든...)가 있을 뿐입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만 해도 심부름을 참 잘합니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 심부름을 점점 꺼립니다. 교사의 특별한 심부름은 잘하더라도 교실봉사같은, 자기에게 맡겨지지 않은 일을 하라고 하면 인상을 찌푸립니다. 이제 서서히 독립성이 증가하고, 합리적인 사고(자기가 싫어하는 그 일을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6학년이 학기말에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 증가합니다. 5학년때느 선배들(작년 6학년)이 은연중에 통제(멋모르고 나내다간 한대 맞거나, 싫은 소리를 들으니까)를 받았기 때문에 교실 밖을 벗어나면 행동이 약간 위축되었던 것이죠.

 

착한 아이도 없지만, 못된 아이도 없습니다. 교육 상담사례들을 보면 '되먹지 못한 아이', '나쁜 아이'라는 표현도 곧잘 보입니다. 아이의 대충 어떤 성향인지 알 수 있게 하는 직관적인 표현일 듯 합니다. 그럼 과연 그 아이가 나쁜 아이일까요?

지나치게 방임상태에 놓인 아이, 부모님께 과도한 통제와 감정적인 화풀이를 많이 받은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공격적인 아이가 되기 싶습니다. 상대방이 싫다는데도 장난이란 핑계로 계속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형이나 누나가 너무 잘나서 열등감을 가진 둘째나  형(오빠)이나 누나(언니)에게 권력적으로 눌려서 장난과 신체적 억압에 시달린 동생들, 형제관계가 없는 아이들이 왕따의 주동자가 됩니다. 나쁜 것은 당해도 학습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착하다'고 칭찬하는 것 문제가 되는 본질적 이유는 아이를 '칭찬'에 얽매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착하지 않은데 착하다고 하니 혼란에 빠집니다. 또한 '착하다'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갑이요, '착하다'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불평등한 관계에서 내려지는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인격을 규정짓는 착하다라는 표현 대신에 '선생님을 도와줘서 고마워', '친구가 욕을 했는데도, 네가 욕을 하지 않고 참아줘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구나, 네 덕분에 선생님 마음이 편해' 이런식으로 본대로 느낀대로 i메시지 방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칭찬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칭찬의 역습'이란 EBS다큐나 하임기너트의 교사와 학생사이, 각종 대화법 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칭찬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일례로 작년에 저희반에 수학 잘하는 아이가 있어서 저는 다른 아이들의 모델링을 삼을 겸, 그 아이의 장점을 살려줄 겸해서 'oo는 수학을 참잘하는구나'라는 식으로 칭찬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 아이가 시험공부에서 유독 수학에 많이 매달린 다는 것, 어려운 문제는 잘 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수학 점수에 특히 목을 맨다는 것,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못푸는 문제가 있어도 교사에게 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아이는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데 남들이 잘한다고 칭찬하고, 점수가 좋으니까 수학에  어쩔 수 없이 매달리는 것이었죠. 6학년 2학기 말이 다가올수록 수학 실력이 떨어지니 아이가 좌절하였습니다. 수학적 원리로 가르치려고 했지만, 학원에서 하는  문제풀이 위주식으로 학습습관이 고착화되서 교정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문제를 참 열심히 푸는구나', '어려운 문제를 끝까지 풀어내는 것을 보니, 나중에 어려운 일들도 잘 이겨낼 수 있겠어' 라는 방식으로 칭찬했어야 합니다.

 

착한 아이는 없지만 나쁜 아이도 없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아이에게 우리가 윽박지르거나, 분풀이식으로 감정을 토해내기, 협박, 비아냥, 부정적인 예언, 인격적인 규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정부적 교실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담임교사가 적절한 시스템을 마련하고 통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필요이상으로 아이를 누르고, 반대로 잘못된 칭찬으로 규정지으면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타율적인 존재,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지나치게 끌려다니는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게 됩니다.

 

이제 다인수 학급 경험한지 일년 반 조금 넘습니다. 그런데 보입니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눌러서 얌전해진 아이는 자기 의지는 꺾이고 강제적으로 눌려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폭발합니다. 부정적인 말과 행동만 눌려진게 아니라 아이의 자율성과 잠재적 성장동력도 눌려있다는 것을. 반대로 교사의 감정적이고 통제적인 방식에 반항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만 망가지는게 아니라 친구들도 망가뜨립니다. 그 뿐입니까? 교사의 긍정적인 영향력도 받지 못합니다. 뭐든 되받아치기 때문에 성장의 에너지를 받지 못합니다. 반항심에 복수를 하려고 교사와 반 아이들을 더 괴롭게 만들겠지요. 

 

학급에서 벌어지는 야생버라이티한 극한 문제에 대해

 

교장 교감도 모든 것을 담임교사 책임으로 보고,

동학년 선생님들도 그것은 그 학급문제로 나몰라라 하고,

학부모는 학교 핑계대고,

애들은 자기 방어하고  담임 선생님 잘못으로 돌리는 상황에서

 

다인수 학급으로 대표되는 열악한 교육환경과 각종 잡무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담임교사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저도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순간 아이들을 대해야 하고 좋든 싫든 아이들과 1년을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위의 문제들이 해결되어도 교사와 아이들과의 관계의 문제는 남습니다.  


 

 

선생님께서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교사는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교사역할훈련도, 비폭력 대화법도, 상담기술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학급 집단의 생리를 이해하고 조절하고 아이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그들의 욕구를 긍정적인 교육활동으로 풀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대에서 배운 이론적인 교육과정과 추상적인 상담교육으로는 입시위주의 과도한 사교육과 무분별한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교육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앞으로 교사역할훈련-비폭력대화법-상담기술에 대한 초등 교사모임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교육적 방향제시와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아이디어, 다양한 사례들이 쌓여서 자유롭게 공급하고, 그것을 연수로 풀어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대화법을 공부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윽박지르고 감정의 그네를 탈 때가 있지만,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화를 내고 가르칠 때나 화를 줄이고 가르칠 때나 결과는 비슷하다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감정적 말들을 줄이고 가르칠 때가 아이들과의 관계도 원활하고 힘도 덜들고 성취도 높았습니다. 제가 대화법으로 하니 아이들에게도 대화법을 접목시킬 수 있었고, 아이들간 갈등문제해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현재 학부모님들과 매달 1회씩 대화법을 공부하고 적용합니다. 학부모 상담은 최고라고는 말못하지만 본능적으로 문제이해의 근원적 접근을 하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상담 공부를 꾸준히 합니다.  

 

너무 글이 길었습니다. 정리합니다.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규정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아이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이의 현재의 모습은 아이가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질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아이를 미워하거나 화낼 필요가 없다. 아이 역시 교사의 적절한 교육적 이해와 방향제시가 필요한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의 문제행동과 학부모의 편협한 교육방식 문제는 남기 때문에 교사역할훈련, 대화법, 구체적인 상담노하우가 필요하며, 그 역할을 인디스쿨 선생님들의 모임과 결과물 공유라는 초등교육 집단지성의 연대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사족-
 

*교사역할훈련에도 대화법에도 상담기술에도 칼로저스라는 큰 인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제자 토마스 고든과 하임기너트가 꽃을 피우고, 그의 제자들과 그들이 쓴 책을 읽고 영향받은 현장 선생님들이 초등교육 현장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권정생작가(동화의 진면목) 와 이오덕 선생님(글쓰기교육의 선구자)이 한짝이었고, 김용택(아이 문학의 재발견), 백창우(권정생-이오덕-김용택-아이들의 문학을 노래로 승화시킨 음악의 선구자)가 함께 했음을 봅니다.  

 

이제 우리 초등 선생님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요?    갑자기 이호철 선생님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보고 싶습니다.




Written by 이상우
현직 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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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at 2011/06/29 19:53
문제 부모와 문제 교사가 있을 뿐이지요.
좋은 기사 잘 봣습니다.
교육에 대한 글 자주 올려주세요.^^
연구에 의하면 
wrote at 2011/06/29 20:37
아주 갓난 아기에게도 이타심이 있더랍니다.
첨에 이 연구결과를 보고서 학자분이 놀랐다네요.
생각과는 반대였기 때문이겠죠...

암튼, 착한 아이가 없다기보단, 먹는 것에 대한 부족이나 갈망이 그런 경향(?)을 만드는 걸로 보입니다.
원래 사람은... 성선설이 맞을 거 같네요~
wrote at 2011/11/29 10:24
당연한 얘기겠지만, 가치만큼 제도가 따라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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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길에서 생명의 빛나는 문명을 발견하거라




앞날에서 불어오는 시원하고 맑은 바람의 내음을 맡아보렴.
그 바람은 어김없는 약속이니 좀더 분명히 느껴보거라.

너희는 다른 누군가가 정해준 대로
그저 불만스런 세상이 가두는 대로
그 안에서 참고 견디며 살지 않기를 바래.

역사는 어둠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오해와 자만과 폭력과 게으름이 아직
우리의 신앙 속에 자리잡고 있단다.

이제 곧 거센 물살이 저 구비를 돌아쳐올 때
아무런 흔적 없이 수면 아래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지.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이 우주를 끊임없이 바꾸어나가고,
매 순간 우리 모두의 한 생각이
이 우주의 숨찬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어.

새 시대의 시인이 되거라.
그래서 온 시대 온 세계 사람들이 내는 영혼의 소리를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들어
다음 시대가 취할 가장 멋진 모습을 목청껏 소리내주렴.

새 시대의 화가가 되거라.
그저 눈 먼 충동으로 움직이는 세상의 모든 어리석음을 끊고
더할나위없이 아름다운 색채와 새로운 형태의 구성을
모두의 앞에 펼쳐주렴.

새 시대의 과학자가 되거라.
미신과 맹신의 그물을 끊어버리고
고요하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더없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방정식을 만들어주렴.

새 시대의 투쟁가가 되거라.
자신의 우주에서 누가 누구를 죽이고 굴복시키겠느냐
오직 자신의 마음속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진실의 눈빛으로
모두의 가슴에 정의의 횃불을 밝혀주렴.

너의 눈을 돌려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세상은 언제까지나 어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단다.

예언에 따르면
너희들 가운데는 대략 수천의 천재가 꿈을 꾸고 있으니
깨어나라
깨어나 자신의 길에서 생명의 빛나는 문명을 발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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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는 일이 존재의 가장 고귀한 목적





사람이 낳지 못하면 타락한다.

낳지 못하므로 바깥을 살피고 눈치보다가 굳어진다.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지켜야  것이 없다

자신에게 소중히 낳고 키워낼 것이 없으므로 타인에게 개입한다.

낳아보지 못하였으므로 낳는 일의 비범함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

 

낳는 일은 우주의 진보에 참여하는 일이다.

낳는 일은 상궤를 벗어난다.
상궤를 따라가서 어떻게 새로운 것을 낳겠는가?

낳은 사람은 기르는 일의 소중함을 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있다. 눈치보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낳지 못한 사람이 보기에 그는 바보 같다.
자신을 간수하지 못한다. 앞뒤 재지 못한다.
모두들 태연히  하는 쉬운 일도 허둥지둥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오만하고 굽히지 않는다.

 


 

문명은 낳는 과정이다.
막힌 , 낡은 것이 죽어 새로운 것의 양분이 된다.

문명은 그렇게 창조가 이어져 성숙한다.

 사회가 멀쩡하게 돌아가는 것도 앞뒤 안가리고 낳고 기르는 바보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민함에 우쭐한다.

적어도 바보처럼 보이지 않는 멀쩡한 자기 관리 능력이 있으니까.

그러나  사회, 문명, 그리고 역사는 겉으로 이지 않는 열정을 가진 바보들이 떠받치고 있다.

그들은 아웃사이더이며, 끊임없이 딱딱해지는 시스템에 충격을 가하여 말랑말랑하게 한다.

열정에 넘치는 바보들을 존중해주는 조직, 사회, 문명이 건강하다.

 

바깥을 향해 열리지 않은 구조는 내부로부터 무너진다.

낳는 사람들은 시스템의 외곽에 거주하면서 굳어지는 껍질을 해체하여 멈추지 않고 성장하게 한다.

낳는 사람은 가장 바깥에서 중심을 울린다.

바깥에 거주하면서 중심을 울리는 자들이 진정 문명과 진보와 역사의 중심에 있다.

 

아이의 마음을 거울로 삼아라.  마음과 가까이 있으라.

아이들은 진보와 열정과 창조의 영감  자체이다.

자신의 것을 낳아라. 남을 따라가기에 억겁을  바쳐도 허무할 뿐이다.

낳아봐야 생명을 진정 존중하게 되고 열정의 값진 의미를 깨친다.

아이들과 아이의 마음을 가진 자들과 낳는 자들을 존중해주라.

이들이 진정  문명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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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가 뭐죠?



퍼포먼스라는 외래어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익숙한 용어가 되었습니다. 현대미술, 연주나 공연 등에서 무척 폭넓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요즘은 어린이 미술의 한 분야로 자리잡기도 했죠.


그래서인지 그리기나 만들기 등 전통적인 미술수업이 아닌 활동적인 미술놀이를 막연히 '퍼포먼스' 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퍼포먼스는 원래 예술적인 영감의 원초적인 표현입니다. 그것은 회화나 조각보다 더 직접적인 표현이며, 그만큼 강렬한 전달력을 가집니다.
 





그렇다고 예술가들의 어려운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려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눈을 돌려 우리 아이들을 보면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내면의 영감으로부터 솟아 올라 행위로 표출되면 창의적인 퍼포먼스가 됩니다. 누가 시키는 것을 하는 게 아니라 제 흥에 겨워 행위를 지어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행위는 일상의 틀에 박힌 행위가 아니라 ‘독창성’을 띠게 되죠. 실은 모든 창조적인 예술이 그렇습니다.
 




잘 준비된 레시피에 따라 아이들을 길들이기보다 그저 자신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따라 춤출 수 있도록 두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어요. 아이들이 보여주는 창조적인 퍼포먼스의 가치를 발견하고 함께 즐기고 감상할 수 있다면 저절로 좋은 교육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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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진 판사 이야기


우주적 정의?



판사가 어떤 판결을 내릴 때 시대적 정의를 초월한 지구적 정의, 내지는 우주적 정의를 이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각종 소액사건심판이 넘쳐나는 지금의 사법부에서는 더욱더 보기 힘든 일이라 할 수 있다.

정의, 아니 '우주적 정의' 는 별로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해보면 뻔히 답이 나온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범법자라도 인간인 점을 이해하면 말이다. 무조건적인 관용을 베풀자는 얘기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남을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것은 그 남에 자신이 기대고 있음을 망각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면 떡검도 너그럽게 인정하라는 말로 오해할 수 있겠으나, 그건 아니다. 맥락이 그렇다는 말. 요령처럼, 수학공식처럼, '남' 이란 단어에 색검 떡검 넣어서 공식대입하여 답안 만들면 안된다는 거다. 정의는 최소한 인간미가 넘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판결이라는 것도 인류공동체가 진보하는 방향으로 맞추어진다면 언제든 다시 그 정의로움 때문에 지금처럼 회복하기 어려운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다시 되돌려지지 않겠는가?

아래 글은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9.28 서울 수복 이후 서울지방법원에 근무했던 어느 판사가 자신이 내린 판결에 대하여 술회한 내용의 일부이다. 이 재판에 적용된 법령은 [비상사태 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으로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비상사태 하의 특정 범죄들에 대하여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하고 
② 재판은 항소를 허용하지 않는 단심제로 진행하며 
③ 1인의 판사가 재판을 담당하여 반드시 40일 내에 판결을 선고해야 하고 
④ 판결에서 증거의 설명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것 등 이었다. 



나는 여기서 소위 비상사태 하에서 발생했던 한 절도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법률의 노예가 되지 말자


피고인은 당시 17,8 세 되는 두 명의 중학생이었다. 두 학생은 모두 독실한 가정에서 자라난 자제들이었으며, 대단히 순진하게 보였다. 이 두 학생의 범죄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6월 28 일 오후 2시경, 두 학생은 밖으로 놀러 나가 경찰 책임자의 집 앞을 지나다가, 인민군들이 그 집의 가재 도구를 실어 내 트럭에 싣고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 


열린 대문을 통해 집 안을 쳐다보니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두 학생은 문득 호기심에 끌려 그 집마당으로 들어서서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인민군들이 미처 실어 내가지 못한 양주 몇 병과 비눗갑, 기타 일용품 둥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그 물건들을 본 두 학생은, “야! 우리도 이것을 가져가자! 이까짓 것쯤 가져간다고 누가 뭐라겠니?" 라며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20 여 일에 걸쳐 경찰로부터 검찰청을 거쳐 재판소에까지 넘어온 사건이었다. 법률상으로 볼 때 그 학생들의 행위는, 비상시국에 편승한 소위 '비상사태 하의 절도' 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면 아무리 관대하게 처분을 하더라도 징역 10년에는 처하여야 할 것이었다. 과연 두 학생에 대하여 그런 처분을 해야 할 것인가?

소위 절도란 사람 없는 집에, 혹은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들어가 물건을 훔쳐 내는 것이다. 그 두 학생의 행위가 범죄 의도의 측면에서 그다지 악질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절도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건만, 이 경우는 비상사태 하의 절도이기 때문에 사형이나 무기 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라는 중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아마도 사회가 혼란해지면 온갖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그것이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런 범행을 미연에 완전히 봉쇄하기 위하여 “알겠지? 물건을 훔치면 10년 이상의 징역이야” 라고 경계하려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본건 범행자들에 대해서도 10년 형을 선고해야 하는가?

아니다!

아무리 그런 규정과 요청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 정도의 중형을 과할 수는 없었다. 나는 법과 현실 간의 너무나도 큰 괴리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로 법에 사로잡혀야 할 지경이라면 아니 법률의 노예가 될 지정이라면 나는 판사직에서 떠나 버려야 한다.

이러한 고민은 또 다시 재판의 목적과 법률의 준수 간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이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법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아니 법을 무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재판을 통해 하나의 규범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윽고 나는 무모하게도 무죄의 판결을 하였던 것이다.





조봉암 선생 1심 재판




1958년 조봉암 선생 1심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유 판사는 "조씨 등이 북의 지령을 받고 이에 호응했다거나 간첩과 밀회했다"는 등의 공소사실은 인정되지 않는다며, 간첩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불법무기 소지만을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켜 "용공판사를 타도하라"는 시위대가 법원 청사 안으로까지 난입하기도 했으며 유 판사는 결국 그해 말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그는 2년 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씨가 받았다는 돈을 북한이 보내왔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전혀 없었다" 며 "내가 선고한 징역 5년이라는 것도 마음 아픈 판결이었다. 그 판결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고 말했다. 



기술자의 덕목


도대체 법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뭐 법은 그냥 도구일뿐, 법적용은 기술자의 덕목일 뿐이다. 기술자 무시하는 발언아니다. 중요한 기술임에는 분명하고, 그 기술적용에 논리성과 사건 분석력, 판결문 구성력 등등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모두 그럼 무엇을 하는데 쓰는 것인가? 법은 다분히 그 존재 자체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나왔다.




인류공동체를 해하는 무리들을 엄중히 판결하여 처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무리들에게 존엄함을 보여줄 수 있는 , 즉 한편으로는 범죄행위에 대한 분노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범죄자에 대한 애정을 보여줄 수 있는 판사는 작금의 시대에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광기에 가까운 여론의 압력속에서도 유병진 판사의 판결문은 귀감이 될 수 있는 판결이라 하겠다. 몇천 건의 넘쳐나는 시대에 야합하고 정치에 부화뇌동하는 판결과는 질이 다른 것이다. 특히 삼성판결, 검찰의 기강해이 등으로 사법부의 본질이 의심스러운 이때야 말로 더욱 더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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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정말로 다른 별에서 누군가 지구를 방문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아이들과 몇몇 어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일 거야. 그럴 때 부자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공무원과 대학교수들이 먼저 나서서 외계인이 크게 위험하니 그들과 접촉을 삼가고 한시 빨리 물리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겠지. 그들 입장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식있고 힘있는 분들이 하는 얘기니 의심하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하자고 의견을 모을 거야.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희망을 가지기에 버거운 현실속에서 허덕이고 있더라도,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선동을 더 열렬하게 신봉할 테지. 이게 우리가 사는 지구별에서 인간이 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 새로운 것이 생겨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 사람들의 삶은 강물처럼 흘러온 대로 움직이려고 하게 마련이거든. 그러나 새로운 것이 태어날 때는  항상 미약하고 흐릿할 수밖에 없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그러나 너희들은 자신을 온전히 존중받기 위해 몰이해, 무시, 비판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해. 그토록 바라는 행복은 그냥 주워지는 것이 아니야.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함부로 무시하도록 두지 않을 거야. 그래야 해. 너의들의 팔팔 뛰는 감성으로 둔한 사회에 맞서야 해. 그것이 진정 성공하는 길이고, 더 깊이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고, 한 사람이 보낼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인류에게 보내는 일이기도 해.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지.

"시험 점수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
"자격증을 더 많이 가져야 무시당하지 않는다"
"돈을 더 많이 모아야 성공한다."

그러나 그런 성공은 사람을 점점 옥죄어 결국 좁디 좁은 성에 갖히게 만들어. 너희가 진정 성공하면 새로운 길을 내어 더 커다란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돼. 그래서 뒤에 오는 사람들이 더 멀리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게 해주는 거야.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
 

생명은 진화를 하지. 진화는 기존의 것을 품되 외부의 에너지를 받아들여 전혀 다른 길을 열어젖히는 방식으로 나타나거든. 마찬가지로 막다른 길에 이른 역사는 반역에 의해 새로운 장을 열어. 그래서 나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너희에게 예의와 도덕, 기법과 기술을 가르쳐주고 이것이 너희를 행복하게 해준다거나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그보다 오히려 반역에 대해 들려주고 싶어.

20세기 멋진 할아버지 예술가들이 있었지. 그들은 뒤집는 사람들이었어. 자신의 창의의 씨앗을 자각하고 용기있게 그것을 키워나가라고 용기를 주었지.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진짜 자신과 만나는 길을 찾아야 해. 그러기 위해 먼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반역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믿는 것에 반역하는 연습이 되어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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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묵혀 두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 재능이 없어도 잠재력을 발현시킨다면 가능 한 그림그리기.

제가 원래 사람들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방식에 타고난(?) 관심이 있는탓에

일반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림교육을 하고 있다.

4비 연필 처음 잡는 사람부터 학원을 전전하다가 오는사람, 미대입시를 치른 사람.

10대~68세 까지 경험이 있으나 4비 연필 처음 잡는 사람이 습득능력이 높은 경우가 제법 있다.

 

주로 세상 보는 법을 바꾸는 훈련을 한다.

용도,상징적인 방식으로 보는 관점에서 미술적 정보를 통해 보는 법을 훈련한다고나 할까.

단, 수업을 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 그림에 손을 대지 않고 본인이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원칙.

혹독한 스파르타식으로 진행함 ㅎㅎ-좋게 표현하자면 기선제압!






12회 수업 전

 



 





12회 수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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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떠받치는 표정

세상에 나와 처음 바라본 사람의 얼굴은 어떠했나요? 어떤 표정이었는지 기억 나시나요? 나는 그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어떤 여인의 표정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어요.
누구도 부럽지 않고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지요. 그 표정은 내 삶의 모든 시간을 떠받치고 있답니다. 내가 아무리 작아져도, 어떤 어두운 길을 걷고 있어도 여전히 내 삶은 온전히 그 풍요의 바다 위를 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표정으로 말미암아 그 누구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과, 그 누구의 뒤를 쫓기 위해 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어요. 기억해보세요. 눈을 감고 조금만 기억을 더듬으면 분명 처음 본 그 표정을 또렷이 기억해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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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삶의 수채화 






첫 개인전에는 쇳덩어리를 수채화로 무겁게 그리다가  현재는 서정적으로 보여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말라 죽어버린듯한 마른 들판의 풀들을 그리며 그 속에서 부글부글 넘쳐 나는 생명력을 표현하고 싶었다. 올해 준비하고 있는 개인전은 그런 내용을 한층 더 표현 해 보고자 하고 있다. 이후에는 구조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은 희망이 있다고나 할까.

 

주로 소재와 주제에서는 외롭고 쓸쓸한 정서를 담은 자연풍경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모두 수채화로 그렸는데, 굳이 수채화라는 매체를 선호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다.


하나는 동양권의 수성물감에 대한 전통 때문이다. 먹과 물, 혹은 수성채색물감을 이용하는 방식은 그에 따른 기법이나 정서의 표현에도 동양인만의 특성이 담겨있다. 또한 수성물감의 우연성과 즉흥성, 여백, 퍼짐, 농담 따위의 특성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내 그림 속의 풍경은 사람들의 관심이 덜한 소외되고, 어둡고, 외로운 풍경이지만 늘 우리 곁에 존재하는 모습들을 담았다. 현대인들은 화려함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지위, 명예, 경제력을 추구한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쫓기다시피 살아간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생활은 온통 타인의 시선에서 결정된다.


사회생활에서 타인의 시선은 삶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이 좋든 싫든 관계없이 말이다. 자신만을 위한 삶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에 타인의 시선은 운명적이다.







하지만 그 사회를 이루는 개인은 늘 초라하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화려함과 지위, 명예, 타인의 시선과 관심에서 멀어진 자신을 만난다. 나이가 들어 사회에서 밀려나도 그렇고, 사회활동에 실패하거나 응징을 받거나 심지어는 사랑에 실패하거나 승진에서 떨어져도, 아니면 사회생활에 깊이 개입하지 못해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이러한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당한다. 누구도 피해 갈 수가 없다. 이럴 때 사람은 한없이 초라함을 느끼게 되거나 허전하고 공허함에 몸부림치게 된다. 이런 결과로 자살을 하거나 미친 사람이 되거나 낙오자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모습, 본연의 모습이다. 인간 심리에 대한 자크 라캉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외롭고, 쓸쓸함, 고독함, 슬픈 감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밑바닥의 깊은 정서이며 그것에서부터 삶은 시작된다. 나는 이것을 인간의 본디 자리, 본연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정서는 역설적으로 인간을 기쁜 존재로 혹은 긍정적으로 협력하고 창조하는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 초라함이 때로는 강력한 열정과 창조력 혹은 커다란 행동을 만들어낸다. 바닥 정서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이 곧 문명을 창조한 것이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어떤 화려한 문명을 창조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바닥정서는 없어지지 않는다. 마치 물을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는 경우와 같다. 인간이 존재한다면 삶의 의욕은 넘쳐날 것이다. 더 나은 문명과 소외와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행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명력과 창조력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고 또한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축구를 응원하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군중이 모이는 자리에만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돌아가 자신만의 거울을 혼자 보고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나는 인간이라는 한 사람의, 자신의 거울을 보는 그 자리가 궁금했다.


나의 작품은 단순히 쓸쓸하고 초라하고 소외된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을 위로하거나 사회생활에 실패한 사람들은 다독여주려고 이런 풍경을 그린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도 아주 역설적으로, 차분하고 안정된 색감의 화면이지만 사람의 원초적 열정이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 같은 자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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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여교사 폭행사건에 대해

 

 


(수원 여교사 폭행 - '친구폭행' 지시 부적절한 훈계)

 

 

아무리 선생님이 잘못했다고 해도 학생이 주먹질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학생이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욱해서 대형사고를 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생이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닙니다. 저보고 고등학교 생활 다시 하라면 차라리 다시 입대하겠습니다. 군대는 안전하게 제대만 하면 끝이지만, 고등학교는 입시에 대한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하고, 학교에 학원에 부모님 잔소리에, 친구들과의 알력과 경쟁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도 90년대 초 수원 동원고를 다녔습니다. 별의별 체벌을 다 당한 것도 힘들었지만, 공부에 대한 중압감과 휴일이 거의 없는 등교학습,  친구들과의 지나친 경쟁의식이 사람을 참 비참하게 하더군요. 고등학생만 그런가요? 초등 고학년부터 따지면 적어도 7-8년동안 학원과 입시지옥속에서 허덕이게 됩니다.


문제는 이제 민주화되면서 수직적인 인간관계는 합리적인 선이 아니면 통하지 않으며,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권위적이고 감정적으로 사용하면 언제든지 교사가 험한꼴을 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니쌤이 충분히 체벌(비교육적인 일체의 폭력)이 교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글로 남겼으니 읽어 보세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86년)때 여자 담임선생님이 심한 장난을 친 남자 아이들에게 맞따귀를 시킨 것을 목격했습니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장난으로 얼굴을 건드리던 애들이 나중에는 광인의 눈빛을 하고 사정없이 친구 얼굴을 후려쳤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담임 선생님도 놀라셨는지 다른 말씀없이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때 남자 담임은 숙제를 잘 안해오는 학생을 두 분단 사이의 통로로 지나가게 하고 통로 사이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발거는 것만 빼고, 손바닥과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하게 했었습니다. 한번은 반장을 불러서 마대자루로 생활태도가 고약한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라고 시켰는데, 그만 반장이 긴장해서 허리를 내리치는 바람에,  맞은 아이가 매우 고통스러워서 팔을 허리에 대고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더군요.

 

 

 

 

2. 어떠한 경우라도 때리지 마세요.

 


 

며칠 전 아침이었습니다. 우리반의 예찬이(특수아동)가 아침에 늦게 온데다가 교실에 들어와서도 다시 복도로 나가고, 다시 들어오지 않으니 전담 시간의 다른 반 선생님들이 예찬이 보고 교실로 들어가라고 하고.. 저도 신경이 쓰여서 빨리 들어오라고 했는데... 그래도 안들어오더라구요. 요즘 제시간에 수업참여하기를 훈련하던 중이었는데, 저는 결국 폭발했습니다.


문을 확 열어제치면서


"야, 김예찬!", "빨리 안들어와!!!" "도대체, 언제 들어올꺼야!"


복도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호통을 쳤습니다. 예찬이는 놀란 듯 하더니 문앞에서 멈칫 했습니다. 한 두 시간이 지나서 예찬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계속 제 옆에 있는 것을 피합니다. 제가 좀더 다가가서 얘기하려고 하니 "흥" 이러면서 고개를 돌립니다. 미안하다고, 선생님을 용서하라고 했지만, 예찬이가 놀라서 충격을 받으니 그간 공을 들인 점진적인 교육은 다시 퇴보를 하고, 나의 화를 받은 예찬이도 마음속에 각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화가 학습이 된거죠.


참 길게도 곁가지 얘기했습니다. 저는 아이의 주먹질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교사분이 아이의 화를 돋구었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친구를 때려라? 책을 안가져오면 친구에게 꿀밤을 먹여야 합니까? 뒤에 나가서 서있게 하든지, 책이 없어서 못한 과제를 다음시간까지 해오게 하면 됩니다. 꿀밤에 욕설까지 해서 그 학생이 제대로 교육이 되겠습니까?


여선생님으로서, 고등학교에서, 남자애들 잡는게 얼마나 힘든지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친구의 머리를 때리게 하는 것은 절대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당결부금지원칙 위반이요, 폭행교사(가르칠敎 부추길唆)에 해당합니다. 인도적으로 절대 허용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가장 비인간적인 처우입니다.


저도 전담시간에 가장 난리치고 선생님께 예의없이 행동하는 아이의 머리를 모자로 십여차례 때리고, 서너차례 머리 앞부분의 머리카락을 쥐어 당겼다가, 아이가 학교를 뛰쳐나가서 5시간 넘게 행방불명되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그 아이가 참 미웠죠. 5학년때도 한 번 뛰쳐나간 것을 얘기해주지 않은 어머님이 너무 야속했죠. 그러나, 그것이 제가 아이에게 심한 마음의 상처를 남기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야기시킨 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이는 독립적인 인격체이자 성인과 동등한 인간임에도 아직은 발달과정상 미성숙하고, 여러가지 문제행동을 일으킵니다. 그때문에 교사의 적절한 조력이 필요한 것인데, 그 과정중 감정적인 문제로 아이의 인권을 침해하고(저도 하루에도 수없이 침해합니다만) 아이에게 화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사들 조차도 어렸을 적에 여러 교사에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던 경험이 있고,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녹아져있다가 비슷한 일을 겪게 되면, 한 번 두번 참다가 결국엔 폭발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감정의 폭풍이 큰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화나는 그 순간'에는 떠올리지 못하고 제어에도 실패한다는 겁니다. 

 

 

 

 

3. 분노는 나의 것

 


 

살인범들이 사람을 죽일 때는 그 순간 자기가 사형당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답니다.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객관적인 상황에 눈에 들어와  고통으로 몸부림칩니다. 교사를 살인범에 비유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간이 감정의 폭풍에 휘말릴 때의 위험성을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적인 감정 조절 훈련을 해야 하고, 그 분노의 상황을 위에서 내려다봐야 합니다. 자꾸 감정에 휘말리지 않도록 나의 감정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애랑 싸우는 것과 애를 교육하는 것은 종이 한장 차이입니다. 애랑 실컷 싸우고 애를 깔아 뭉개고 나서 '나는 교육을 했다'고 '나는 잘하려고 했다'고 우겨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프로페셔널이 되지못하고 선무당식으로 아이를 잡아서는 안되는 거지요.


우리반 재성이(전두엽 이상으로 감정통합능력이 떨어짐)는 감정이 폭발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온 난리를 칩니다. 그래서 재성이가 인터넷을 찾아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찾아보게 했더니

 


1. 자신이 화난 것을 인식한다.

2. 심호흡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3. 화나는 이유를 생각한다.

3. 문제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4. 화로 인해 내리는 처방을 자제한다(화가 가라앉으면 적절하지 않은 처방임을 깨닫게 되므로) 

5. 화가 가라앉지 않으면 문제 해결을 적어도 5분이상 늦춘다.  


 

처음에 1~4번을 재성이에게 강조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 처방은 바로 저한테 먼저 내려야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1학기때는 맞불로 재성이와 싸웠는데, 요즘에는 제가 감정 조절을 어느 정도 해나가니까 아이의 감정조절 능력도 많이 좋아졌고, 반아이들도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분노는 사실 남에게 내는 것이 아니고, 자신한테 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화를 내는 겁니다. 문제상황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를 감정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노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고, 자신에게는 후회와 자책을 가져옵니다.            


그동안 언론상에 충격적인 모습으로 보도된 교권실추 사례를 보면 거의 7-80%이상이 교사의 원인제공에 있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업무상 잘못을 했다고 해서 담당업무 선생님이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선생님께 심하게 대한다면 과연 우리는 참을 수 있을까요? 어찌할 수 없이 참더라도 며칠밤을 괴로워할껍니다.


다인수 학급에, 학생인권은 강화되고 교사인권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현실, 문제상황속에 매몰되어 교사의 감정적 폭발로 이어져 아이에게 비인격적이고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교사의 예기치않은 불행은 계속될 것입니다. 


요즘 언론상의 교권침해 사례유형을 보면서 자칫 교권확립은 더 멀어지고, 교사가 폭행을 자초했다는-교사의 자질 논쟁으로-여론이 기울어질까 걱정됩니다. 




 

Written by 이상우

현직 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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